광주민중항쟁 45주년 자료모음
광주민중항쟁 일지
배경
1980년의 봄은 ‘민주화의 봄’이라고 불립니다. 왜냐하면 18년 유신 독재의 아성을 지켜 오던 박정희가 자신의 심복 김재규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이른바‘10.26 사태’(1979)를 계기로, 이 땅 민중은 민주화를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되었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 전개되었기 때문입니다.10.26이라고 불리는 박정희 암살 사건은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1960년대부터70년대 내내 계속된 민주화 투쟁, 특히 1979년에 접어들어 YH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 사건, 부마 민중 항쟁 등으로 급격히 고조된 민주화 투쟁의 도정에서일어난 일인 만큼, 그것은 마땅히 이 땅의 민주화로 이어져야 했습니다. 이렇게,유신 독재의 아성을 18년간이나 지켜 오던 박정희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사라진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한 개헌 논의가 전 민중의 높은 관심과참여 속에 본격화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각계각층의 민주화 운동은 봇물 터지듯 전격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1980년 새 학기가 시작되자 유신 체제하에서 허용되지 않았던 총학생회와 교 수 협의회가 많은 대학에서 부활되었고 3월과 4월 두 달 동안 학원 민주화 운동 에 주력한 학생들은 5월 초부터 본격적인 사회 민주화 투쟁에 돌입하였습니다. 전국의 대학생들은 유신 잔당 타도, 계엄 철폐, 정부 주도 개헌 반대, 정치 일정 단축 등을 외치며 5월 13일부터 가두시위에 돌입하였고, 급기야 5월 15일 서울 에서는 30만의 시민, 학생이 서울역 광장에서 궐기 대회를 성사하였습니다. 이러 한 때 광주의 대학생들도 5월 14일부터 가두로 진출하여 민주화를 요구하는 평 화적인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광주의 중심인 도청 앞 분수대 에 집결, ‘민주화 성회’를 개최하고 민주화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를 제출하였습 니다. 이렇게 시작된 횃불 시위는 16일 밤 3만여 명까지 참여했습니다.
한편, 노동자들의 요구 역시 거세게 터져 나왔습니다. 전국 각지의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 근로 조건 개선, 노조 결성, 어용 노조 민주화 등을 요구하며 투쟁에 일제히 돌입하였습니다. 10.26 이후 1980년 5월 17일까지 노동쟁의 발생 건수 는 2168건에 달했으며, 투쟁 방식도 작업 거부, 농성, 가두시위 등 완강했습니 다. 특히 1980년 4월 20일, 임금 인상, 어용 노조 민주화를 내걸고 시작된 강원도 사북 동원 탄좌 노동자들의 투쟁은 매우 격렬한 것이어서, 유신 체제하에서 빼앗기고 억눌리고 당하기만 해온 노동자의 분노가 어떤 것인가를 여실히 증명 하였습니다.

이처럼 각계각층의 민주화 요구는 분출하고 있었지만 현실의 다른 한편에서는 역사의 시계 바늘을 되돌리기 위한 음모가 꾸며지고 있었습니다. 1979년 12.12 쿠데타로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장세동, 박준병 등의 이른바 신군부의 유신 잔재 세력은 새로운 군부 지배체제로의 개편을 확립하기 위한 준비를 은밀히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태 반전을 위한 이들의 계획은 5월 17일의 비상계엄 확대 조치로 드러났습니다. 이와 함께 계엄 사령부는 학생 운 동, 노동운동의 지도적 인사와 김대중 씨를 비롯한 재야 정치인, 민주 인사, 그 리고 유신 세력의 일부를 불시에 급습, 체포하였고 전국의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습니다. 마침내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 노동자, 시민들에 대해 군부가 정면 도전을 하고 나선 것입니다.
5월 18일
비상계엄 확대 조치가 발표되기 전부터 광주전남지역 12개 대학에 700여 명의 공수특전단이 투입되었습니다. 이들은 각 대학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학교 도서관 등에 남아있던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연행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일요일인 18일 오전 10시쯤에는 도서관에 들어가려는 학생들과 상당수의 학생들(휴교령이 내려지면 10시에 교문 앞에 모이자고 약속되었음)이 전남대 정문 앞에 모여들었습니다. 학생들은 정문 앞 다리에 연좌하여 “비상계업 해제” “휴교령 철회” 등의 구호를 외쳤고, 정문을 지키던 공수부대는 갑자기 “와” 소리와 함께 달려 나와 최루탄을 쏘며 곤봉으로 학생들을 무참히 폭행하였습니다.

오후가 되자 학생들은 시내중심부를 벗어나 시민들에게 계엄사실을 알리기 위한 시위에 돌입하였고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공수부대는 시위대는 물론 지나가는 시민들에게도 곤봉과 대검을 무자비하게 휘두르고 30분 만에 300여명을 연행하는 등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금남로 일원에서 몸을 피한 학생 시위대는 일시 흩어졌다가 다시 공용터미널 광장에 모여 터미널 대합실의 사람들에게 공수부대의 잔학상을 폭로하였습니다. 이 와중에 해산한 일부 시위대가 터미널 안으로 몸을 피하자, 공수부대가 터미널 안까지 무차별 최루탄을 발사한 후 방독면을 착용하고 대합실 안으로 들어가 젊어 보이는 사람 들마다 닥치는 대로 곤봉과 총개머리판으로 구타하여 끌고 나갔습니다.
5월 19일
이날 아침부터 거리에는 살기가 돌았고 인적이 드물어졌습니다. 그러나 어제 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이 오전 11시 경부터 금남로 3가 가톨릭센터 앞으로 몰 려나와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시위대열은 학생들은 거의 모이지 않은 채 일반시 민들로 구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공수부대의 진압방법은 18일보다 한층 잔혹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수창초등학교 앞에서는 청년 한명을 전봇대에 기대어 세워놓고 시민들이 보는 가운데 집중 구타하여 피를 토하고 쓰러지게 했으며, 이날 오후부터는 붙잡히면 상하의를 벗기고 팬티만을 입힌 채 도로상에 무릎을 꿇리고 구타를 자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이든 시민들이 계엄군의 만행에 항의하거나 추격을 제지하면 가차 없이 진압봉으로 내리쳐 이날 나이든 사상자가 제일 많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날은 시내 고등학교 학생들도 시위에 참가하였습니다. 중앙여고생 1,300명은 아침 10시부터 교복에 흰 리본을 부착한 채 죽은 학생을 위한 추도식을 갖고 교내 시위에 들어갔고, 대동고와 광주일고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한 채 노래와 구호를 외치며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이날을 기해 시내 각 고등학교에 휴교조치가 내려졌고, 고교생들은 이날부터 개별적으로 시위대에 합류했습니다.
5월 20일
5월 20일 오전은 시내 전역에서 밤을 지새우는 시위가 있었던 탓으로 소강상태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오후가 되면서 당시 계엄사에서 최초의 사망자로 공식 발표되었던 시민의 시체 한 구가 시민들에게 공개되면서 상황은 더욱 격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전남주조장에서 발견된 이 시신은 김안부 씨로 얼굴과 가슴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상태였습니다. 시민들이 이 시신을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로 진출, 다른 시민들에게 공개함으로써 다시 시위가 가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눈앞에서 수많은 시민, 학생들이 대검에 찔리고, 형언할 수 없을 지경으로 피곤죽이 되도록 구타를 당하는 상황을 목격해 온 시민들이었지만 얼굴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짓뭉개진 시신을 눈으로 확인하자 결사적 대항 의지를 갖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민들은 이날 오후부터는 계엄군의 착검한 대검과 곤봉에 맞서 각목과 쇠파이프 등으로 자위적 무장을 하고 대치함으로서 시위가 이전의 양상과는 달라졌습니다.
한편 5월 19일 시 외곽에서 시민들을 시내로 실어 나른다는 이유로 계엄군에 의해 살해된 택시운전사 4명의 시신이 시내 운전사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5월 20일 공설운동장에 시내 차량들을 집결하고 오후 5시경에 도청 앞에 있는 계엄군을 차량으로 물리치자는 결의로 차량시위를 전개하였습니다. 이날의 차량시위는 택시운전자들만이 참여한 것이 아니라 시내버스, 대형트럭운전자 등도 참여했는데, 이는 18, 19일 양일간에 공수부대가 시내를 운행하던 시내버스를 무조건 세우게 한 후 차내에 있던 젊은 청년이나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하여 끌어내리는 만행을 곳곳에서 자행하여 운전자들이 이를 많이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금남로는 일시에 뒤엉킨 차량과 자욱한 최루탄 가스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공수부대의 진압봉에 맞아 머리가 깨지고 어깨가 내려앉았으며, 비명과 함성이 뒤섞이고 피가 낭자했습니다.

당시 외부와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던 광주시민들은 광주에서 자행되고 있는 공수부대의 만행이 타 지역에 제대로 알려져야 한다는 갈증을 가지고 있었으나, 언론에서는 소요의 모든 원인을 불순분자의 배후조종으로 보도하고 있었으며 계엄군의 잔악한 만행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이 불행한 사태의 수습을 위해 군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보도만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언론에 대해 시민들은 격분하였고, 마침내 문화방송이 불태워졌습니다.
10만여 명에 이른 시민들은 그 여세를 몰아 지역에 있던 시민들과 합세하여 광주역으로 향했습니다. 광주역 광장에 이른 시위대는 도로가의 가로등과 공중전화 부스 등으로 바리게이트를 설치하고 계엄군과 대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가 부족한 계엄군이 밀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시청 지역에서 공수부대가 시위대에 의해 고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5월 21일
21일 새벽 6시경 광주역 부근에서 밤을 새운 시위대는 계엄군이 물러난 광주역 안으로 몰려갔습니다. 이들은 대합실에서 계엄군이 버리고 간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도청 앞 광장으로 출발했습니다. 한편 공수부대는 연행자들의 수가 많아지자 미처 상무대로 이송하지 못하고 전남대에 구금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수부대는 이곳 전남대학교에 다시 들어올 때마다 여기에 구금되어 있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형언할 수 없는 만행을 자행했습니다. 구금된 시민들을 세워놓고 대검으로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하는가 하면 헤아릴 수 없는 구타를 자행했습니다. 공수부대는 21일 전남대학교에서 광주교도소로 이동하면서 전남대에 구금되어 있던 시민들을 함께 이송했는데 군용 부식차량에 시민들을 세워서 빽빽하게 태운 후 그 차안에 최루탄을 터뜨리고 밖에서 문을 잠가버린 채 이동하여 그 차안에 있던 상당수의 시민들이 질식, 또는 화상에 의해 중상을 입고 희생되었습니다.
이렇게 광주교도소에 도착한 시민들은 교도소 내 창고에 구금된 채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상태에서 몽둥이로 맞고 군홧발에 걷어차이는 등의 구타와 기합, 그리고 끊임없는 조사 등으로 엄청난 고통을 치렀던 것입니다.
시민들은 이날 오전에 아시아 자동차로 몰려가 군용트럭과 버스, 장갑차 등을 몰고 도청으로 모여들었습니다. 9시가 넘어가서부터는 차량을 이용한 도청공격이 본격화되었고, 차량을 몰고 도청으로 진격하던 시민과 차량 위에서 태극기를 흔들던 시민 모두가 계엄군의 총탄에 희생되었습니다. 공수부대는 도청에만 몰려있는 상태였고, 시민들은 도청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10시쯤에는 시위현장에서 뽑은 대표 김범태 씨와 전옥주 씨가 도청 안으로 들어가 장형태 전남도시자를 만나 협상했습니다. 전남도지사는 ‘군 철수는 최대한 노력하겠으며 나머지도 책임지고 처리하겠다’고 밝히고 대표들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도지사의 무책임한 약속에 시민들은 시위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고, 11시쯤에는 시위대가 10만을 넘어섰습니다. 계엄군을 철수시키기로 약속한 12시가 되어도 계엄군이 철수하지 않자 시민들은 도청으로 조금씩 밀고 들어갔습니다. 이제 군인들과의 거리는 10m밖에 안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12시 30분쯤 도청 스피커에서는 애국가가 흘러나왔고 시민들은 숙연해졌습니다. 그러나 애국가 소리가 끝나자마자 콩 볶는 듯한 소리가 진동하며 앞에 선 시민들이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금남로에는 수십 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습니다.

도청에서의 대학살이 있은 후 광주시민들 안에서 “우리도 무장을 하자. 그리하여 저 원수들을 광주에서 몰아내자”라는 요구가 일어났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오직 맞서 싸우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다수의 청년들이 나주, 화순 등 광주 인근지역으로 빠져나가 예비군 무기고에 있는 무기들을 확보했고, 오후 3시를 전후하여 광주시내로 진입하였습니다. 이 무기는 즉각 시민들에게 분배되었고 드디어 무장 시위대가 탄생하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불렀습니다.
무장한 시민군의 숫자는 1천여 명에 달하였고, 오후 3시 15분경 시민군과 공수부대의 교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시민군은 도청을 에워싸고 금남로, 충장로, 전남의대 방면에서 공수부대를 압박했습니다. 무장시위대의 출현은 민중들에게는 벅찬 환희요, 감격이었지만, 신군부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경악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광주시민이 무장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그들은 일단 군부대를 철수시킨 뒤, 광주를 극도의 고립 속으로 몰아넣은 상태에서 적당한 시기에 무력을 집중하여 항쟁을 분쇄시키기로 하고 광주 외곽으로 철수하였습니다. 그간 학살의 참상을 함께 경험한 광주시민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감격에 겨워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5월 22~24일
22일 아침이 되면서 많은 시민들이 도청으로 들어갔으나 통일된 지도부가 없어서 체계가 잡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오전 11시경 지역 유지급 인사들이‘수습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사태 수습에 나서기로 하고, 재야인사들은 수습대책위에 합류하여 정부당국에 대한 7개항의 요구사항을 결정하였습니다.
이를 가지고 수습위원 8명이 상무대 전남북계엄분소를 방문하여 군측과 협상하였으나, 계엄군은 불성실하게 협상에 응하면서 ‘무기회수’만을 강조하였습니다. 도청에 들어간 재야인사들은 학생들을 모아 ‘학생수습대책위’를 구성하기 시작했습니다. ‘학생수습대책위’는 즉각 무기회수에 들어가 2천여 정의 버려진 무기를 도청으로 수집했습니다.

시민들 앞에 나서지 못하고 계엄분소에 들러 상황보고만 듣고 시민들에게 보내는 호소문만 내놓았는데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들의 노력으로 광주사태는 호전되고 있다. 시민들은 일부 폭도와 불순분자들의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에 현혹되거나 부화뇌동하지 말라.”는 어처구니없는 내용의 것이었습니다. 또한 저녁 7시 30분 전국적으로 중계된 라디오와 TV방송을 통해 “현재 광주시내에는 군 병력도 경찰도 없는 치안부재상태이다. 일부 불순분자들이 관공서를 습격, 방화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군인들에게 발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은 명령 때문에 시민들에게 발포하지 못하여 울화통이 터지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같다.”고 말해 많은 광주 시민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한편 22일부터는 지금까지 유인물을 제작하였던 힘을 합하여 ‘투사회보’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5월 25일
오후 5시 경 최규하 허수아비 대통령이 상무대를 방문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미국과의 합의내용을 토대로 27일 이후에 전교사(전투교육사령부) 사령관인 소준열 소장의 책임 하에 충정작전계획을 실시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도청에서는 25일 오후 새롭게 지도부를 결성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수습위원들이 종용하는 대로 계엄군의 일방적인 항복요구에 무릎을 꿇고 만다면, 도청에 있는 수습위원들은 역사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며 지금까지 고귀한 생명들을 바쳐 이루고자 했던 이 땅의 민주주의는 영원히 포기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도청 내에 ‘민주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 조직은 뒷날 통상 ‘항쟁지도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조직 구성과 더불어 계엄군과 장기적으로 대치할 것으로 판단하고 투쟁위원회는 시민생활을 정상화시키고 산만하던 무장력을 통일된 지휘체계로 조직화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무장력 개편을 위해 도청 주변에 산만하게 배치되었던 경계요원을 25일 새로 도청에 들어온 일반 대학생들로 교체했으며, 예비군을 동원하여 외곽경계를 서도록 하고 기동타격대를 편성 운영키로 하였습니다.
5월 26일
도청의 항쟁지도부가 날을 새우며 새롭게 조직을 개편하고 장기전을 준비하는 동안 계엄군의 진압작전은 차근차근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는데 새벽 5시경 화정동 통합병원에 버티고 서있던 계엄군의 탱크가 시내 쪽으로 돌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엄군 진입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다시 도청 앞 광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권기대회가 자연스럽게 열렸습니다. 분노가 가득한 시민들이 분수대에 올라가 계엄군의 잔인성과 시민군과의 협상을 배신한 사실을 규탄하였습니다.
시민들은 22일부터 매일 오후 3시와 9시, 두 차례씩 도청 분수대 앞에서 궐기대회를 갖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시민들은 특히 질서유지에 역점을 두고 시민들로 치안대를 구성해 경찰서장집, 박인천 사장집, 관공서 등 요소요소에 배치하여 폭력, 방화, 강도를 방지했습니다. 시위차량도 조직적으로 나누어 지휘차, 대변인차, 식량수송차, 무기수송차, 시민수송차로 역할을 전개했으며 또 생필품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쌀과 석유의 매점매석을 막았습니다. 광주시민들은 7번의 집회를 통해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면서 새로운 질서와 사회상을 창조하였습니다.

25일 궐기대회에서는 미7함대 소속 항공모함이 부산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미국이 자신들을 도와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6일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마친 시민들은 민족과 역사 앞에 끝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시민들은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고 투쟁을 다짐했습니다. 이 노래는 광주시민들이 항쟁기간 가장 많이 부른 노래였습니다. 그 시각 도청 옥상에서는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시민 여러분! 오늘 밤 계엄군이 쳐들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광주 시민 여러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죽어도 좋다는 사람들만 남고 나머지는 돌아가십시오.”
300명 시민이 도청에 남았습니다. 투쟁위원들은 살아서 증언할 사람도 있어야 한다며 여자들과 고등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갈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10명의 고등학생들은 형들과 함께 하겠다며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이날 밤 항쟁지도부의 윤상원 대변인은 시민군에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5월 27일
새벽 2시경 계엄군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탐지되었습니다. 이에 도청에 비상명령이 내려져 그동안 실탄 없이 경계근무를 서던 경계병들에게 실탄이 지급되고, 기동타격대 병력이 배치되었습니다. 시민군이 부지런히 뛰며 병력을 배치하던 중 계엄군은 이미 도청 앞까지 와 있었습니다. 공수부대는 도청후문 뒷담을 넘어 숨어들었고 계엄군은 도청을 포위하였습니다. 시민군은 정면의 계엄군 탱크를 향해 몇 차례 응사하였지만 화력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는 월남전에서 맹위를 떨치던 캐터필러가 요란스럽게 소리를 내며 도청주위를 맴돌고“폭도들에게 알린다. 즉각 총을 버리고 자수하라.”는 방송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시민군의 화력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게 되자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 만행을 알려야겠다며 총을 머리위에 치켜들고 흰 손수건이나 런닝을 벗어들고 건물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러나 계엄군은 그들마저 M16으로 사살하고 말았습니다.
YWCA를 지키던 젊은이들도 계엄군의 기습에 대항하였으나 총 몇 발 쏘아보지 못한 채 죽거나 다쳤습니다. 동이 터올 무렵 수십 명의 사망자를 내고 총소리는 멎었고 계엄군은 도청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이날 확인된 희생자는 26명으로 노동자 12명, 대학생 6명, 고등학생과 재수생 8명이었습니다.
계엄군은 날이 새면서 도청 등에 남아있던 시민군은 물론 주변의 민가까지 샅샅이 뒤져 젊은이들은 무조건 연행했습니다. 그들은 연행한 사람들을 건물 밖으로 끌어내어 엎드리게 한 뒤 포승줄이나 전깃줄로 두 손을 등 뒤로 결박하고 목에 걸기도 했습니다. 연행된 사람들은 군용버스와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실려 갔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계엄군의 총칼이 휩쓸고 간 뒤 도로의 핏자국과 건물의 총탄자국은 지워졌지만 항쟁의 열기와 학살의 진상은 결코 가려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5·18묘역에 누워 산자들에게 끝없는 힘과 용기를 주고 있으며 그들의 심장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오월 광주의 열사들
1980년에 들어서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시위를 역사에 길이 남을 전민중의 항쟁으로 이어갔던 것은 오직 광주, 전남지역의 민중들뿐이었다. 이들은 광주항쟁 직전 대학생들이 이끈 민족민주화 성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도청 앞에서 만납시다’라는 구호를 전 항쟁기간동안 목숨을 건 약속으로 지켜냈으며, 정당한 민주화 요구를 잔인하게 짓밟았던 계엄군의 학살진압에 직접 총을 들어 맞섰고, 군부독재세력이 철저히 고립시킨 광주를 진정한 해방구로 꽃피웠다.
이처럼 자발적으로 일어나 무고한 피를 흘리며 계속됐던 민중들의 투쟁이 진정한 역사로 거듭나기까지는 끝까지 민중들과 함께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았던 투사들이 있었다.
민중에 대한 믿음으로 민중의 투쟁을 끝까지 책임졌던 윤상원
윤상원 열사는 광주항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무기를 반납하고 투항하려 했던 수습대책위원회에 맞서 항쟁지도부를 조직하여 끝까지 광주의 혁명정신을 지켜냈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그의 활동 중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5월 17일 전두환 군부일당은 계엄령을 확대하고 학생운동 세력과 민주인사를 예비 검속하는 한편, 광주에 공수부대를 보내 시위 군중을 극심한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광주지역의 재야운동력이나 학생운동 지도부는 공수부대의 살상진압으로 광주 시민들의 투쟁이 곧 사그라질 것이라 예상하고 서둘러 몸을 피했다. 그러나 윤상원 열사는 민중들의 항쟁이 이대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지금 시민들이 들고 일어섰다. 그들의 가슴 속에는 광란하는 독재자들과 공수부대를 향한 적개심이 가득 차 있다. 내일 어떻게 될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의 시내 상황으로 봤을 때 분명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이 중요한 시기에 운동했던 사람들, 지식인들은 어떤가? 거의 꼬리를 감추었고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나서야 한다.”
이러한 믿음은 그가 들불야학 활동을 통해 노동자, 도시빈민들과 삶을 함께하면서 더욱 다져진 것이었다. 실제로 전 항쟁기간 동안 가장 헌신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던 계층은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기층 민중들이었다. 당시 사망자 명단의 직업란을 보면 이러한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식당 종업원, 보일러공, 벽돌공, 재봉사, 운전수, 점원, 구두닦이 등 이들은 군부독재에 맞서 끝까지 무기를 잡고 저항의 의지를 꺾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큼 큰 희생을 치렀던 것이다.
윤상원 열사가 어떠한 마음으로 야학을 꾸리고 운동을 하였는지 다음의 일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야학운영과 강학들의 활동에 관련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던 중 모든 강학들이 오전 10시에 모여 야학의 앞날을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늦거나 불참하여 12시가 넘어서야 대부분의 강학이 모이게 되었다. 이때 열사는,
“우리가 이곳에 놀러왔는지 아니면 민중이 주인 되는 역사발전을 위해서 왔는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야학 운영은 장난이 아니다. 우리가 서로 확인했지만 그것은 민중과 역사 앞에 한 준엄한 약속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이 자세는 무엇이냐?”
라고 일갈했다. 열사의 말은 강학들의 마음을 때렸다. 모두 자신의 각오를 혈서로 쓰기로 했다. 윤상원 열사는 '죽기 위해 살자'라고 적었다.
그 말 그대로 모든 삶을 다해 치열하게 살았던 열사는 그 투철함으로, 민중들이 들고 일어났던 순간 자신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었다. 그는 사실상 지도부가 사라진 시민들의 시위 대열을 이끌게 되었던 것이다. 윤상원 열사와 함께 항쟁기간 동안 전력을 다하여 시위에 참여하고, 열사와 함께 끝까지 도청을 지켰던 것도 들불 야학의 청년 노동자들이었다. 윤상원 열사를 비롯하여 박관현 열사 등 여러 헌신적인 강학들과 더불어 야학에서의 배움으로 현실에 눈떴던 이들은 항쟁기간 동안 해방된 광주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몫을 다했다 진정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들불 야학의 꿈이 타오르는 순간이었다.
27일 밤, 드디어 항쟁의 마지막 순간이 왔다. 계엄군들은 도청을 향해 무장을 하고 쳐들어오는 중이었다. 윤상원 열사는, 계엄군에 맞서 끝까지 도청을 지키는 사람들은 목숨을 잃겠지만 긴 역사 속에서 항상 그러했듯이 다시금 민중들이 일어서서 그 투쟁을 이어갈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광주는 불의한 세력에 맞서 굴복하지 않은 승리의 역사를 써내려가야 했다. 다음은 그 자리에 있었던 모두의 가슴에 남은 윤상원 열사의 마지막 연설이다.
“여러분, 우리는 저들에 맞서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냥 도청을 비워주게 되면 우리가 싸워온 그동안의 투쟁은 헛수고가 되고, 수없이 죽어간 영령들과 역사 앞에 죄인이 됩니다.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끝까지 뭉쳐 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불의에 대항해 끝까지 싸웠다는 자랑스러운 기록을 남깁시다. 이 새벽을 넘기면 기필코 아침이 옵니다.”
전민중이 사랑했던 광주의 아들, 박관현
박관현 열사는 1980년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광주항쟁 직전까지 광주에서 민주화 시위를 이끌며 시민과 학생들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던 인물이었다. 그는 군대를 다녀온 뒤 뒤늦게 대학에 입학하여 맞은 1학년 겨울방학 때, 전남대 학생들이 기획했던 광주 광천동 지역 노동자들의 실태조사에 참여하면서 노동자와 지식인의 참된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실태조사를 위한 합숙이 계속되면서 조사반원들은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히거나 추위와 배고픔 등으로 피로가 쌓이면서 의욕이 저하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박관현 열사는 밤늦도록 자료를 찾고도 가장 먼저 일어나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였으며, 귀가했다가 못 돌아온 동료에 대해서도 굳게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의 앞선 행동은 다른 동료들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본이 되었고, 말보다 실천으로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다하는 열사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후배 전영호의 회고담이다.
“나는 성원들의 대다수가 아파트 교실에서 작업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아파트 교실의 문을 열었을 때 차가운 방 안에는 관현 형 혼자 정자세로 앉아 여기저기 놓여있는 자료들을 정리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모두들 어디 갔냐고 묻자 형은 잠깐 나갔는데 곧 돌아올 것이라고 대답하고는 야학일에나 전념하라고 당부했다. 나는 그때 형의 모습이 너무도 의연할 뿐 아니라 불성실한 성원들에게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관대함을 지니고 있음을 보고 존경하게 되었다.”
당시 이 같은 모습을 눈여겨 본 윤상원 열사의 권유로 그는 들불야학의 강학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들불야학이 지역 주민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확고한 믿음을 얻기까지 박관현 열사 또한 큰 몫을 하게 된다. 그의 동료 강학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구수한 언변과 침착하고 예의바른 태도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부분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청년들의 감정을 가장 정확히 이해함으로써 청년들과 급속히 가까워졌다’고 한다. 박관현 열사를 만난 이후로 청년들은 일이 끝나자마자 집에 돌아와 그와 저녁시간을 보내곤 했다. 막걸리를 마시며, 고달픈 어린 시절부터의 인생살이와 장래문제, 정치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부모들은 아들들의 달라진 모습에 기뻐했고, 이 일대 주민들은 들불야학과 강학들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후 박관현 열사가 사망했을 때 가장 슬퍼하고 분노했던 사람들도 바로 이들이었다. 다음은 들불야학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 기억하는 열사의 모습이다.
“(서대석) 나는 당시 공장에 취직해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야학일에는 다소 소홀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2월 말, 수련회에 갔을 때도 피곤한 나머지 쓰러져 잠들어버렸다. 새벽에 일어나 살펴보니 관현 형이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너무 피곤하여 하루쯤 쉬겠다고 말했다. 관현 형은 그런 자세는 고치라고 하면서 나에게 식사를 하도록 했다. 나는 그날 아무도 일어나지 못한 시간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해 준 관현 형에게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청년) 어느 날 밤 상원이네 방에 갔더니 관현이가 도시락을 먹고 있어 내가 아닌 밤중에 웬 도시락이냐고 물었더니 ‘이것이 제 저녁밥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상원이네 집도 있고 영철이네 집도 코앞에 있는데 같이 가서 먹지 않고 왜 혼자 먹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얻어먹는 것도 한 두 끼지 어 매일 얻어먹겠소’ 했다. 그렇게 어렵게 활동하면서도 남한테 피해나 신세를 지지 않으려는 관현의 모습이 다른 강학들과 달랐다.”
“(김경국) 편모를 모시고 셋방살이를 전전해야 하는 우리집 실정으로는 야학에 나가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나는 늘 어머님에게 죄를 지은 것 같은 심정에 사로잡히곤 했다. 나는 괴로웠고 그 심정을 관현 형에게 이야기했다. 관현 형은 우리집에 직접 찾아와 어머님을 뵙고 여러 가지 말씀을 해주셨다. 형은 나의 친형이나 우리 어머님의 친자식처럼 믿음직스러운 언사로 어머님을 크게 안심시켜 드렸고 그 후에도 종종 집에 들러 어머님과 이야기하곤 했다.”
원칙적인 삶에 대해서는 비타협적이지만 주위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헌신적이었던 박관현 열사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애정을 받았다. 이러한 열사가 당시 민주화 운동에서 작지 않은 역할을 담당했던 대학생들을 대표하는 총학생회장에 당선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는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이후, 누구보다 앞장서서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고, 대학생들이 벌이는 거리시위에 다른 지역과는 달리 시민들이 합세하여 군중집회가 이루어지곤 했다. 박관현 열사의 지도력이 빛을 발했던 것이다. 학생들의 시위가 광주지역 시민들의 많은 공감을 얻어내면서 열사는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아니라 ‘광주의 아들’이 되었다.
그러나 5월 17일, 예비검속을 피해 잠시 몸을 숨겼던 박관현 열사는 항쟁 기간 동안 다시 돌아오지 못함으로써 시민들의 애타는 부름에 답할 수 없었다. 그는 이러한 죄책감을 짊어지고 항쟁이 끝난 후에도 도피 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도피 시절 옷차림이 궁색한 박관현 열사에게 이모가 새 옷을 권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모님, 이 바지와 구두, 혁대는 보통 것하고는 다릅니다. 이번 5월 광주항쟁에서 계엄군과 싸울 때 앞장서서 싸우다가 돌아가신 윤상원 선배의 옷입니다. 선배님과 저는 형제같이 지냈어요. 나이는 서른이었는데 장가도 안 가고 어려운 일만 하셨어요. 욕심도 없고 오직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다짐한 훌륭한 분이었어요. 이번에 광주시민들이 일어나자 앞장서서 시민들을 이끌었습니다. 지금은 못된 놈의 세상이지만 백년 후나 이백년 후라도 그 선배의 이름은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유품을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남은 상태로 어떻게 광주 영령들의 정신을 계승해야 하는가 고민하던 박관현 열사는 도피시절 일했던 공장 노동자의 신고로 결국 광주 교도소에 수감된다. (노동 현장에서도 언행일치된 모습과 인간미가 넘치는 면모로 많은 노동자들이 그를 따랐고, 신고한 노동자는 다른 노동자들의 멸시와 증오를 견디다 못해 공장을 떠났다고 한다.)
광주 교도소는 재소자에 대한 처우가 형편없었는데, 특히 광주 항쟁 관련자들에 대한 일상적인 폭력과 고문이 자행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분노했던 열사는 감옥 안에서도 단식으로써 투쟁을 이어간다. 정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구타하고 징벌방에 가두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고, 이 과정에서 열사는 죽음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교도소 당국은 최소한의 진료조차 거부한 채 열사를 방치하다가 죽기 직전 풀어주고, 1982년 10월 12일 열사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죽어 간 영령들에게, 또 죄 없이 끌려가 고문을 겪은 선배, 동료, 후배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으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총학생회장으로서 참회하는 마음으로 역사와 민족 앞에 진실을 말할까 합니다. 저는 피 끓는 젊음을 가진 한 대학생으로서 역사적 양심을 가지고 이 나라 모든 백성들이 갈구하는 민주주의의 실현과 민족 분단의 극복을 위해 작은 몸이나마 던졌습니다.…” (열사의 최후진술 일부)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소박한 꿈을 가졌을 뿐인 철거민들이 불에 타 죽고, 살인과도 같은 해고를 막기 위해 노동자들이 물도 전기도 끊긴 공장 안에서 77일 간의 옥쇄파업을 해야 겨우 세상의 관심을 받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여전히 정권은 대다수 서민들이 죽어가든 말든 부자들 배불리기에만 골몰하며, 분노한 국민들의 목소리는 검경의 구속수사와 진압으로 무마하고, 언론은 입맛대로 길들여서 자신들의 안위를 도모한다. 1980년 횃불대성회에서 울려 퍼지던 통일 염원 또한 실현이 요원하다. 우리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518 광주항쟁 열사들의 삶 속에서 그 답을 찾자.
열여덞 살 구두닦이, 나는 고아였다
故 김재형 씨 이야기
재형이는 열여덟 살의 구두닦이였다. 열세 살이던 1975년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서 뛰쳐나온 그는 남광주역에서 껌을 팔며 구걸하고 살았다. 아직은 세상의 아픔을 몰라도 될 어린 나이의 그를 돌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껌통을 들고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구걸하는 그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천덕꾸러기로 비칠 뿐이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를 따뜻이 안아주지 않았고 그의 작은 몸 하나 편히 쉴 곳이 이 세상에는 없었다.
그해 2월, 찬바람이 뼈를 에이는 겨울에 남광주역에서 껌을 팔고 있는 그를 발견한 사람은 방림동에서 소년재활원을 운영하던 오종열 원장이었다. 아동보호소를 뛰쳐나온 지 3, 4일이 되었다는 그는 거지의 몰골 그대로였다. 오 원장은 그를 자신이 운영하는 재활원으로 데리고 갔다.
세상은 재형이를 버렸지만, 재형이는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그 아이에게는 아직 힘든 세상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었다. 그는 성실하고 남에게 베풀 줄 알아서 재활원의 친구들이나 동생들을 제 동기간처럼 살펴주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안팎으로 친구들이 많았다. 재활원에서 조금 자란 아이들은 구두닦이를 하며 제 용돈을 벌기도 했는데, 재형이도 구두닦이를 시작했다. 구두닦이 통을 들고 거리에 나가 지나는 시민들의 구두를 닦아주고 푼푼이 받은 돈이 재형이가 가질 수 있는 돈의 전부였다. 그 적은 돈은 제 용돈이 되고 재활원 운영에도 보탬이 되었다.
넉넉하지 못한 재활원은 시에서 주는 보조금과 오 원장의 사비, 그리고 재형이 같은 아이들이 벌어들이는 작은 비용들로 충당하고 있었다. 재활원은 50여 명의 아이들과 오 원장 부부, 그리고 사감선생님이 외로운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는 가족공동체였다.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은 재형에게도 왔다. 구두를 닦으면서 시내를 돌아다니던 재형이는 계엄군의 만행을 똑똑히 보았다. 수많은 시민들이 무참하게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에 재형이는 그저 구경꾼일 수가 없었다. 재활원의 원장인 오종열 씨가 아이들을 단속하면서 나가지 못하게 하였지만 아이들은 삼삼오오 어울려 시내를 돌아다녔다. 시위 현장 곳곳에 재형이도 서 있었다.
20일 경 시내로 아이들이 또 나갔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모두 돌아왔는데 밤이 늦어도 재형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전화 한 통이 결려왔다. 오 원장의 아내가 전화를 받았다. 누구인지 밝히지 않은 어떤 사람이 재형이가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총에 맞았다고 전했다. 오 원장은 그 다급하고 초조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재형이가 재활원 밖에서 만나 어울리던 친구이고, 함께 시위에 가담했을 것이라 추측할 뿐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 박봉기 사감과 오 원장 부부는 광주고등학교 앞으로 갔다. 인근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시체라고는 없었다. 상무관으로, 도청으로, 전대병원으로, 기독교병원으로 재형이를 찾아다녔다. 몇 날을 헤매었지만 재형이는 없었다. 오 원장은 지치고 말았다. 시내를 아무리 뒤져도 흔적도 없는 아이로 인한 상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더는 찾아다닐 곳도 찾아다닐 힘도 없었다.
그렇게 지쳐가던 그들이 재형이를 찾은 곳은 망월동이었다. 김재형이 망월동에 있으니 가서 옷가지와 소지품, 사진을 확인해서 시신을 확인하라는 경찰서의 통지를 받은 것이다. 재형이는 비닐에 싸여져 망월동에 있었다. 계엄군의 총에 목을 관통 당했고, 그 가엾은 어린 것은 찾아줄 부모도 없이 그렇게 죽어 땅에 묻히지도 못하고 비닐에 싸인 채 썩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낳아 기르지는 않았지만 오종열 원장과 그의 부인은 몇 년 동안 그와 지내면서 많은 정이 들었다. 착하고 성실한 재형이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아이였다. 아직 다 주지 못한 따뜻함이 남았는데 그는 떠나버렸다. 좀 더 세상이 살 만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힘들고 외롭게만 살아간 재형이는 사라졌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재형이의 마지막은 또 얼마나 외로웠을 것인가를 생각하면 지금도 그 아이가 가엾어서 견딜 수가 없다.
오종열 원장은 재형이를 위해 유족회 활동을 했다. 재형이의 사망신고를 하는 중에 그는 많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친부모도, 법적인 보호자도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또 모진 탄압을 받아야 했다. 보안대 등 기관에 끌려가 문책을 받기도 했고, 재활원까지 문을 닫아야 했다. 유족회 활동 중에 친자식이 아닌데 생활안정자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가 8개월 후에 무혐의로 풀려나기도 했다. 어린 넋을 위로하고 싶었던 오 원장의 행위는 항쟁의 피해들을 은폐하고자 했던 당국에 의해 왜곡되었고, 오종열 원장은 10여 년 동안 고통스런 날들을 보내야 했다.
재형이는 제 나라를 위해 청춘을 내놓았다. 외롭고 어두운 어리 시절을 보상 받기 위해서라도 재형이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어야 했다. 가정의 따뜻함도 나누고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인생을 더욱 멋지게 보냈어야 했다.
그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왜곡된 진실을 바로 세워 모두에게 알려주는 것이리라. 재형이의 영전에 그마저도 바칠 수 없다면 우리는 아주 먼 훗날 재형이를 만나도 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_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
열여덞 살 꽃다운 금희의 죽음
故 박금희 씨 이야기
"사람이 죽어갑니다. 피가 필요합니다."
5월 21일 오후 5시 경. 헌혈을 실은 차가 기독교병원으로 가기 위해 막 양립다리를 지날 때였다. 한 여학생이 차를 가로막고 섰다.
"아저씨, 헌혈하러 가는 길인데 저도 병원으로 데려다 주세요."
어든들이 헌혈한 피가 많으니 돌아가라고 말려도 소용없었다. 얼마나 애가 탔으면 어린 그 아이가 헌혈을 하겠다고 혼자서 병원으로 향했을까? 열여덞 소녀의 애틋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금희는 그렇게 기독교병원으로 들어가 어린 눈으로 담기 힘든 부상자들을 목격하고 헌혈을 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다치게 했을까? 내 피로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구할 수 있겠지.’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작은 보탬이 됐다는 생각에 뿌듯해하며 병원을 나오는 금희의 얼굴은 맑았다.
아, 그러나……. 광주 상공을 날며 시민군의 무장해제를 종용하던 헬기에서 금희를 향해 총알이 날아들었다.
“탕탕탕!”
“뭔 일이다냐? 아이고 애기가 총에 맞았다. 저그 헬리콥타에서 쐈다. 오매 어찌끄나 머리에 맞아부렀다.”
“오메 어찌그나 배에 맞았어야, 오메 내장이 다 보인다.”
“아가, 아가 인나봐라. 오메 눈 좀 떠봐라. 오메 죽어부렀다. 죽어부렀다. 어찌야 쓰끄나.”
광주에서 총성은 언제나 멈출 것인가. 금희는 계엄군이 헬기에서 쏜 총에 머리와 배를 맞고 비명소리도 없이 쓰러졌다. 자신이 헌혈한 것의 몇 배의 피를 흘리며 고꾸라진 채 일어나지 못했다.
금희는 광주 농성동에서 아버지 박병민 씨와 어머니 문귀덕 씨의 4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난으로 쪼들리는 가정에서 응석이나 부리고 자라날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1980년 금희는 전남여자상업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가끔은 차비가 없어 한 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학교에 가기도 했고, 도시락을 가지고 가지 못한 날도 많았다. 금희네는 구 농촌진흥원 부근의 공터에 오이며 호박 등 채소를 가꾸어 열 식구 연명하며 바람이나 겨우 막을 수 있을 것 같은 볏짚과 흙으로 만든 집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택시운전을 하며 아버지 대신 가장 노릇을 하던 큰언니는 몇 해 전 교통사고로 눈을 감았다. 법학 공부를 한다는 큰오빠는 고시공부를 한다고 집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가족을 잃은 집안의 여러 문제가 많았지만 금희는 영특하고 몸도 마음도 건강한 아이였다.
학교성적도 좋았고 선도부장을 맡을 만큼 적극적인 성격으로 모든 일에 솔선수범이었다. 음악을 좋아해 기타를 튕기며 친구들과 어울려 노래를 즐겨 부르던 낭만적인 감성을 지닌 아이였다.
21일 오전부터 금희는 집안 청소며 빨래까지 다부지게 마치고 엄마를 불러 ‘밥해서 같이 먹자’고 해놓고 집을 나갔다. 그리고 혼자서 헌혈하러 갔다가 일을 당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딸을 찾아 나섰으나 찾지 못하고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딸의 안위를 그저 하늘에 빌 뿐이었다. 밖에서 간헐적으로 들리는 총소리에 숨이 멎는 듯 놀란 가슴으로 그저 저 속에서도 딸이 살아있게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다음날에는 도청으로 나갔다. 도로에 흐트러진 휘발유통, 임자를 잃고 나뒹구는 짝 없는 신발들, 섬뜩한 핏자국……. 어머니의 불안은 커져만 갔다. 메케한 최루가스 냄새는 숨조차 쉬기 힘들게 했다. 어머니는 목이 탔다. 대인사장에서 양장점을 하는 셋째딸네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 한 모금 마시고 막 숨을 돌리려는데 같이 세들어 살던 이웃의 며느리와 금희네 학교 교장과 교감선생님이 함께 들어섰다.
“오메 아줌니, 금희가 총 맞아 죽어부렀다요.”
살아만 있게 해달라고 그렇게 소원했건만, 그네들은 금희의 사망 소식을 가지고 왔다. 어머니는 시민군의 차를 타고 선생님들과 기독병원으로 갔다. 딸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보자고 탔던 시위차량을 이제는 어머니가 그 딸의 시신을 확인하러 가고 있었다.
사망자 명단에는 김금희로 되어 있었다. 박금희로 이름을 정정하였다. ‘영안실에 누워있는 아이가 정말로 박금희가 아니라 김금희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죄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시신확인을 위해 영안실에 들어갔다 나온 사위가 시계를 건넸다. 시험이 있다며 아침에 찼던 제 오빠의 손목시계에 묻은 피는 믿을 수 없었던 금희의 죽음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사위가 갑자기 바닥을 나뒹굴었다.
“어머니, 아이고 세상에 이런 일이 있다요? 금희 배가, 배가…… 총알이 뚫고 지나가부렀어라. 창자가 다 기어나왔단 말이요. 어무니, 불쌍한 금희…… 오메 환장하겄소.”
그 여린 몸뚱이에 어쩌자고 그토록 많은 총을 쏜 것인가? 계엄군의 총알은 금희의 하복부를 좌측에서 우측으로 관통하였다. 뱃속에 있어야 할 장기들이 밖으로 밖으로 흘러내렸다. 어머니는 통곡했다.
“금희야, 이것아 네가 이렇게 갈라고 집을 그렇게 깨깟이 소지를 했냐? 네가 병원에는 뭣 할라고 와서 이 꼴을 당한단 말이여. 이놈들아 내 딸이 뭔 짓을 했다고 총질을 했냐? 아이고, 이놈들아 내 딸 살려내라, 살려내! 우리 금희, 우리 막내 살려내란 말이다 이놈들아. 아이고 금희야, 금희야…….”
금희의 몸을 깨끗이 닦고 선생님들이 미리 준비한 삼베로 갈아 입혀 베니어합판으로 만든 관에 넣었다. 시신이 얼마나 부었는지 관에 들어가지 않아 꾹꾹 눌러 뚜껑을 닫았다. 딸의 죽은 몸을 관에 넣기 위해, 안 들어가는 물건 집어넣듯 구겨 넣어야 하는 아버지의 손은 떨렸다. 그리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죄 없는 딸을 잃었어도, 억울하고 분통일 터져도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숨죽이며 있어야 했다. 폭도란다. 죄인이라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금희를 도청으로 데려가겠다고 해서 안 된다는 말도 못하고 보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썩어 안 되니 얼른 공동묘지에 가 묻읍시다.”
“아니여라. 도청으로 안 가믄 선생님들이 뭔 변을 당할지 몰라요. 그냥 도청으로 가요.”
분수대를 빙 둘러 놓여 있는 관들 속에 금희를 놓고 울다 집으로 돌아왔다. 23일 다시 가보니 관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상무관으로 옮겨졌다. 딸을 보기 위해서는 신분확인을 위해 주민등록증이 있어야 했다. 어이가 없었다. 날마다 상무관을 오가는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틈이 없고 가슴은 새카맣게 타들어만 갔다. 불쌍한 딸을 언제나 땅에 묻어줄려고 저러는지 걱정이었다.
26일, 상무관에서 유족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던 학생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에 집으로 돌아와 있자니 새벽 2시쯤 어둠을 가르는 총소리가 귀를 찢었다. 수많은 사람의 생명과 꿈을 앗아간 항쟁은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의 마지막 접전을 끝으로 신군부의 총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잣밥은커녕 물 한 그릇도 떠놓지 못하고 보내는 딸을 청소차에 실어 망월동으로 보냈다. 산더미처럼 쌓인 관 가운데 연고자가 있는 관부터 마구 묻기 시작했다. 사람의 장례가 아니었다. 쓸모가 없어진 물건을 땅에 묻는 것과 같았다.
금희가 죽었을 때는 얼른 데려다 장례를 치러주고 싶은 어미의 심정을 무시하고 몇 날을 방치하다가 망월동에 아무렇게나 가져다 묻더니 이제는 파내어 다른 곳에 묻으면 돈을 준다고 했다. 억울하게 죽은 딸을 팔라고 했다.
“사람목숨을 파리목숨보다 쉽게 여기고 내키는 대로 죽여대더니 인자는 즈그들 죗값이 두려웠겄제. 금희 하나 옮긴다고 죽어간 사람들 숫자가 달라질까? 나는 못해. 내 딸을 두 번 죽일 수는 없당게.”
어느 날은 시에서 망월동 묘지를 파헤친다는 소문이 돌았다. 설마하면서도 새벽녘 조용히 유족들과 함께 망월동에 갔다. 천인공노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묘를 파 시신을 꺼내 짊어지는 짐승 같은 인간들이 보였다. 인기척에 놀라 달아나는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파헤쳐진 묘를 세어보니 20여 구. 눈이 뒤집히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들의 만행은 그렇게 그칠 줄 몰랐다.
어려 세상을 떠났으나 금희에게도 제사를 지내줘야 했다. 그런데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딸의 제사를 숨어 지내야 했다. 7월 17일은 금희의 생일이다. 그날도 금희의 친구들은 망월동 산 속에 숨어 들어가 생일축하를 해주었다.
금희의 이야기가 <금희의 오월>이라는 연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이제는 이름도 잊혀져간다. 보상금을 받았으니 이제는 그만 하라고 한다. 그만 목소리를 죽이고 잊고 살라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잊는단 말인가? 어떤 것도 사죄 받지 못했는데……. 어머니는 눈물만 흐른다.
“나는 인자 너무 늙어서 힘도 없어라. 언제 죽을랑가도 모르겄소. 나 가기 전에 5.18이 완전하게 밝혀져야 해라. 그래야 우리 금희 만나도 할 말이 있지라. 안글믄 나는 죽어서도 우리 금희 못 본당게라. 얼마나 보고 싶은 새낀디 죽어서도 못 본단 말이요. 우리 금희, 보고 싶은디, 보고자퍼 죽겄는디…….”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_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
항쟁의 완성
결전의 준비
날이 어두워지면서 이슬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있었다. 궐기대회를 마치면서 사회자가 최후까지 싸울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가능하면 예비군들이 많이 남아달라는 부탁을 해서였는지, 150여 명의 궐기대회 잔류자들 중에는 80여명 이상이 군 제대자였다. 이들 중에는 여학생들도 10여명이나 포함되어 있었으며, 나머지 60여명은 고등학생들과 아직 군대 경험이 없는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YMCA 대강당에 집합하여 전투조를 편성했다. 여성부에서 준비한 식사가 나왔다. 그들은 서로 최후의 만찬이라고 얘기했다. 여학생 10여명은 간호대로 편성되었고 무기를 원하는 여학생들도 있었으나 나머지는 각 지역으로 분산, 배치되었다. 군 제대자는 주로 외곽지역으로 배치되었으며 군 미필자는 YMCA와 도청을 사수하기로 결정했다.
조 편성을 마친 뒤에 윤상원, 박남선, 김종배, 정상용을 비롯한 항쟁 지도부 간부들이 작전회의를 가졌다. 예비역 대위 출신인 예비군 중대장의 지휘 아래 신병으로 들어온 시민군의 사격술 훈련도 실시되었다.
YMCA 쪽에는 홍보, 민원, 보급지원 업무를 수행하던 여성부 등의 인원이 남아 있었다. 민중언론, 궐기대회 및 가두방송의 선전조가 40여명, 송백회 여성간부 5명, 취사담당 여공 15명, 경비담당 10명으로 총 70여명이었는데 이들 중에는 여자가 50여명, 남자가 20여명으로 대부분이 여자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항쟁 지도부를 구성한 사람들의 아내들도 여럿 남아 있었다(이들 중 일부는 초저녁에 집으로 돌아갔고, 나머지는 밤늦게까지 가슴을 태우다가 27일 새벽 2시경 계엄군의 진입이 확실해진 것을 확인하고 여자들만 인근 교회로 피신하게 된다).
도청 항쟁 지도부에서는 상황실장 박남선의 지휘로 전투 준비를 하면서 외곽지 시민군 배치현황이 점검되고 있었다. 11시까지 완료된 광주시내 병력 배치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유동 삼거리 10여 명(본부 파견)
덕림산 20여 명(본부 파견)
(이곳에는 50~200명의 예비군 자체방어가 형성되어 있었으므로 훨씬 많은 숫자로 추정된다)
전일빌딩 40여 명(LMG 기관총 설치)
전대병원 옥상 수 미상(LMG 설치)
서방시장 수 미상
학동, 지원동, 학운동 30여 명
(문장오를 중심으로 한 예비군 방어지역)
공원 부근과 광주시 외곽에 산재되어 있던 훨씬 많은 수의 자체방어 병력은 파악되지 않았다.
또한 이날 새벽 도청 안에는 10여명의 여학생들을 포함하여 200~500명쯤이 남아 있었다(이 숫자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200여명 정도라는 설은, 항쟁 기간 중에 평소에는 도청 인원이 300~400명 선이었으나 이날은 초저녁에 150여명이 빠져나가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500명 정도라는 설은, 최후의 결전이 끝난 뒤에 상무대 계엄분소 헌병대 영창에 수감된 인원이 350여명인 것으로 미루어 도청 안에서 적어도 150여명은 피살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견해이다. 또한 400명설은, 초저녁에 김창길과 함께 많이 빠져나갔으나 실제로 그날 밤에 불어난 숫자는 평소보다 훨씬 많아서 식사와 취사에 곤란을 겪었다는 점을 들었다. 도청 내의 사망자를 감안한다면 상무대에 연행된 350여명 중에는 지역전투에 참가한 사람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라는 점 때문에 500명설은 좀 많은 것으로 본다는 견해이다. 이는 마지막 전투에서의 사망자의 정확한 숫자가 발표되지 않은 탓이다).
도청 방어병력은 도청의 담벼락 주위로 전면과 측면 쪽에 2, 3명이 1개조가 되어 2미터 간격으로 밀집 배치되었다. 도청 뒤로는 약 40여명 정도만 부속건물에 배치했다. 그리고 나머지 전원은 도청 전면 건물 1층부터 3층까지 복도의 유리창을 전부 깨고 도청 앞 광장을 향하여 배치됐다. 당시에 지하실은 무기고로, 1층은 부엌, 2층은 식당으로 사용했던 원래의 민원 봉사 건물에는 무기고의 다이너마이트를 의식하고 50여 명을 2층에다 특별히 배치했다.
기동타격대 전원은 시내의 각 지역을 계속 순찰하면서 계엄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본부에 그 이동상황을 보고했으며, 계엄군이 공격해 올 때는 곳곳에서 접전을 벌였다.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항쟁 지도부 전원은 며칠씩 잠을 잘 수 없었고 식사도 하루 한두 끼밖에 먹을 틈이 없었다. 너무나 바쁘고 피로에 지친 며칠간이었다. 그들을 지탱해 준 것은 시민들의 자기회생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 그리고 자신들의 주장이 갖는 정당성과 그 정당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었다.
어느 고교생은 어두워질 무렵에 도청 앞에서 온 거리가 떠나가라고 처절하게 울어댔다. 자기 누나가 공수대에게 잔인하게 학살당했다는 것이었다. “내게 총을 주세요. 나도 싸울 수 있어요!” 울부짖는 어린 학생을 지켜보던 지도부 청년들의 가슴은 메어지는 것 같았다. 그 학생은 이날 밤 최후의 전투에 참가하여 계엄군의 총에 맞아 역시 자신의 누나처럼 죽어갔다. 이날 밤 7시쯤 지도부 중의 한 사람이 도청 뜰에서 어정쩡하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라 서성대고 있는 두 젊은이를 발견했다. 그들은 울먹이며 말했다. 두 사람은 친구인데 18일과 19일까지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부모님들이 붙잡는 바람에 집안에 며칠 동안 숨어 지냈지만, 친구가 세 명이나 죽고, 가두방송으로 대학생들은 모이라는 말을 듣고 양심이 거리껴 도저히 더 이상 방관만 할 수 없어서 궐기대회를 구경하다가 도청으로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하나는 전남대 1학년 학생이고 다른 하나는 재수생이었다. 그들 중 한 명도 이날 밤 죽은 친구들의 뒤를 따랐다.
이날 초저녁에 지도부에서는 결전을 위하여 모인 학생들에게 집에다 전화를 걸어서 자신이 지금 도청에 있다는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리도록 권유했다. 부모의 애타는 호소에 못 이겨 돌아가는 학생들도 있었다. 시내의 여러 가정에서 도청에 끊임없이 전화가 결려왔다. 이 싸움은 집단적인 것이었으나 죽음은 개인적으로 찾아올 것이 분명했고, 더구나 신념 없는 선택은 죽음을 가치 없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밤 10시에 항쟁 지도부의 한 사람은 항쟁 과정에 동참했던 아내를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최후의 작별을 했다. “만일 오늘 밤을 무사히 보낸다면 내일 아침 9시부터 나와서 밥짓는 일을 도와주오. 그리고 애들이 아빠를 보고 싶다고 보채거든 내일은 한 번 데리고 나오지. 우리 식구가 모두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해 주시오.” 그의 아내는 다른 시민군들이 보는 데서 껴안을 수도 안길 수도 없고 차마 목에까지 차오른 울음을 내뱉을 수도 없어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대고 낮게 흐느꼈다. 그는 아내의 등을 밀어주고는 도청으로 걸어 들어갔다. 고아로 자라나 구두닦이를 하며 천대받는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던 박용준은 이날 밤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듯, 나중에 발견되어 그의 벗들을 오랫동안 울리게 될 유언장을 쓰고 있었다. 그는 YMCA 방어를 책임지고 있었다.
우리의 피를 원한다면 하느님, 이 조그만 한 몸의 희생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희생하겠습니다. 하느님, 나는 무엇입니까. 너무 가냘픈 존재올시다. 너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올시다. 주님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위해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더 큰 고통과 번뇌와 시련을 듬뿍 주셔서 세상을 이겨나갈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십시오. 고아라면 모두 이를 갈겠지요. 사회가 버린 부랑아입니다. 내 형제들, 어린 동생들, 이렇게 죽는 나로 말미암아 두세 겹의 고통과 멍에를 짊어지고 쓰레기로 태어나 쓰레기처럼 살 수밖에 별 도리가 없겠지요. 하느님,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양심이 그 무엇입니까. 왜 이토록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십니까. 이렇게 주께 갈급하게 구해야만 세상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하렵니다. 하느님, 도와 주소서…… 모든 것 용서하시고 세상에는 관용과 사랑을…….
(박용준의 유고에서)
격무에 정신없이 시달리던 시민군들은 어느 결에 총을 껴안고 의자 위에 쓰러지거나 책상에 엎드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실권을 장악한지 이틀 만에 세워 놓았던 여러 가지 계획들을 실천해볼 겨를도 없이 최후와 맞서고 있었다. 하지만 여한은 없었다.
비상! 비상!
지하실에 안치된 시체의 썩어가는 냄새와 향냄새가 어둠이 깔린 도청 건물 안에 가득차 있었다. 정적 속에서 텅 빈 거리를 내다보며 경계 근무 중인 시민군들은 어째서 평소에는 그 냄새를 깨닫지 못했었는지 기묘하게 생각했다.
밤 11시 50분, 상황실에서 초조함을 못 이긴 상황병이 도청 행정전화로 중앙청 상황실을 불러냈다. “여기는 광주 도청이다. 오늘 밤 계엄군을 시내로 진입할 것인가.” “모르긴 하지만 안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만약 계엄군이 들어오면 우리는 다이너마이트로 자폭한다.”
통화가 끝나고 정각 자정이 되자마자 시외통화가 끊겼다. 마지막 27일, 항쟁 10일째로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전화가 끊긴 것을 알고 상황실 안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계엄군이 공격해올 징조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도청 안의 모든 전등을 꺼버렸다. 홍보부에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결정했다. 박영순(1956년생 21세, 광주 송원전문대 보육과 2년, 24일부터 선전조로 가두방송을 하며 시내를 순회함)이 홍보차량에 올라 새벽 3시까지 광주시내 전 지역을 돌면서 마지막 가두방송을 수행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때 거의 모든 광주 시민은 깨어 있었다. 그리고 애절한 여학생의 부르짖음을 오랫동안 기억했다. 어둠과 정적뿐인 거리 저편으로 가두방송 소리는 이어질 듯 끊길 듯 하면서 차츰 멀어져 갔다.
도청 상황실로부터 계엄군이 진입할 것이 확실하다는 통보를 받고 YMCA에서 대기 중이던 외곽 배치 병력은 신속하게 그들의 방어지역으로 이동했다. 계림국민학교 부근에는 30여 명의 병력이 육교를 중심으로 좌우의 건물과 학교의 담을 엄폐물로 삼아 서방과 오치 방면에서 들어오는 계엄군을 차단할 계획이었다.
새벽 2시쯤 YWCA에서 밤을 새우던 여자들 50여 명은 모두 일어나 인근의 가까운 교회로 피신했다. YWCA에는 남자들만 20여 명 남았으나 총이 10정밖에 없어서 총이 없는 사람들은 무기를 받으러 도청으로 갔다.
3시경, YMCA에 남아 있던 고등학생과 군 미필자가 대부분인 청년들은 무기를 지급받기 위해 도청 무기고 앞으로 줄을 지어 구보로 들어갔다. 윤상원이 무기고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무기를 받으러 온 청년들을 똑바로 정렬시키고, 짐짓 그들을 긴장시키기 위하여 ‘앉아, 일어서’를 수십 회쯤 반복 실시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30분 동안 어둠 속에서 실탄과 카빈 소총이 지급되었다.
새벽 2시 30분, 도청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졸고 있던 사람들도 조별로 배치받은 자기 위치를 찾아갔다. 항쟁 지도부였던 윤상원, 김영철, 이양현은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직전 서로 손을 맞잡으며 “이제 우리 저승에서나 만납시다” 하는 인사를 던지고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상황실장 박남선이 전체상황을 지휘했다. 실탄이 얼마 되지 않으므로 계엄군 측에서 발포되기 전에는 어떠한 경우라도 먼저 사격하지 말 것, 사격은 상황실장의 통제에 따를 것, 되도록 근접하기까지 기다릴 것 등을 그가 지시했다.
상황실에는 시시각각 계엄군의 진입 현황이 보고되어 들어오고 있었다. 변두리 지역 주민들의 전화 제보가 통과 지점을 알려오고 있었으며, 순찰 나간 기동타격대의 무전보고도 숨 가쁘게 상황실로 접수되었다. 외곽지에서는 포성이 들려오고 간간이 조명탄이 하늘을 대낮처럼 밝혔다. 계엄군은 시 변두리에 진입하면서 주택가에 불이 켜져 있거나 사람이 움직이는 기척만 보이면 무조건 M16소총으로 갈겨댔다. 이때의 총격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피살되었다.
새벽 3시,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지원동 입구, 서방 입구, 한전 입구로 일제히 진입하여 대기 중이라는 무전이 들어왔다.
지원동-광주천-적십자병원-도청 남쪽 (양평 20사단)
지원동-학동-전대병원-도청 후분 (20사단)
백운동-한일은행-도청 정문 (20사단)
화정동-양동-유동 삼거리-금남로-도청 정문(상무대 병력)
서방-계림국교-시청-도청 북쪽(31사단)
또한 격전장이었던 광주공원은 7공수, 도청은 3공수, 관광호텔과 전일빌딩은 11공수가 투입되었다.
이날 아침 광주에 진입한 계엄군이 수도군단 상황실로 타전한 「광주 상황 보고서」 에 의하면 계엄군의 시간별 진입 내용이 상세하게 나타나있다.
03:30, 작전개시
04:10, 도청에 투입
04:11, 도청에 3공수 투입
04:30, 광주공원 7공수 투입
04:40, 관광호텔 전일빌딩 11공수 투입
04:53, 도청에서 61연대 지원 하에 폭도들과 치열한 교전
04:55, 도청 완전 점령
05:04, 광주보병학교 외곽배치 완료
05:05, 광주공원 완전 진압
05:10, 62연대 1대대 도청 병력증원
05:20, 61연대 2대대 광주경찰서 진입
05:22, 도청 잠적 폭도 소탕완료
최후의 항전
3시 40분쯤 계림국민학교 앞 육교에서는 상당히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지역은 예비군 중대장이 직접 시민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계엄군은 육교가 있는 도로를 따라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산장입구 쪽 산수국민학교 담을 타고 계림국민학교로 들어오면서 시민군들에게 측면 공격을 가해 왔다. 십 여분 이상 총공격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계엄군측은 상당히 많은 수로 불어났다.
시민군 30여 명 중에서는 벌써 두세 사람이 사살당하고 있었다. 그때 지휘자는 이 자리를 고수하다가는 완전 포위될 것 같다고 판단하고 후퇴하라고 소리를 지르며 부상자를 남겨둔 채 20여 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계림국민학교의 정문 쪽 담벼락을 따라 달려갔다. 시민군들은 계림국민학교와 광주고 사이에 있는 높이 2미터 이상의 담벼락을 휙휙 뛰어넘어, 대원들을 보니 불과 7명밖에 남지 않았다.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시민군이 비교적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고 나서 또 한 차례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계엄군은 광주고등학교 뒤쪽 담벼락을 넘어 들어와 배후를 역습했다. 그들을 또다시 광주고등학교의 북쪽 담을 끼고 뛰었다. 배후와 측면에서는 계속해서 총탄이 날아와서 담벼락 끝에 부딪쳤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중대장은 담벼락 아래쪽에 있는 주택으로 뛰어내렸다. 마당으로 뛰어내리는 소리를 듣고 놀란 집 주인이 나왔다가 그를 황급히 감춰 주었다. 총성이 얼마쯤 가신 뒤에 살펴보니 그의 허벅지에서는 총탄이 박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머지 대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후에 회상하기를 그의 판단으로는 거의 대부분이 사망했을 거리고 했다. 외곽지역 곳곳에서는 이와 비슷한 전투가 산발적으로 전개되었다.
새벽 3시 30분, 도청의 인근 사방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가두방송을 듣고 도청을 향하여 집을 뛰쳐나온 젊은이들이 계엄군들의 포위망에 걸렸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도청 주위를 맴돌다가 수백 명이 체포되고, 달아나던 사람들은 가차없이 사살되었다.
도청 상황실에서는 자폭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한 청년이 눈물을 주먹으로 씻으며 말했다. “고등학생들은 먼저 총을 버리고 투항해라. 우리야 사살되거나 다행히 살아남아도 잡혀 죽겠지만 여기 있는 고등학생들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산 사람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빛나는 미래를 위해, 항쟁의 마지막을 자폭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자, 고등학생들은 먼저 나가라.” 청년의 눈빛이 번득였다. 장내는 숙연해졌고 수류탄을 움켜쥐고 있던 고등학생들은 흐느껴 울었다.
새벽 4시쯤, 도청 앞은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고 금남로를 중심으로 시가전이 벌어졌다. 계엄군의 장갑차 위에서 서치라이트가 도청을 비추는 가운데 계엄군은 항복 권유의 최후통첩을 방송했다.
“폭도들에게 경고한다. 너희들은 현재 완전히 포위되었다.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도청 안은 아무 반응도 없이 고요했다. 순간 총성이 울렸다. 시민군 측에서 발사한 총탄이 계엄군의 서치라이트를 박살냈다. 다시 캄캄한 어둠이었다. 계엄군의 일제사격이 개시되었다. 그들의 자동화기가 콩 볶는 소리를 내며 일시에 퍼부어 왔다. 도청 배후를 지키던 40여 명의 시민군들은 총소리를 불안하여 자꾸 건물 앞쪽으로 이동해 왔다. 이 틈을 타고 공수대원 몇 명이 도청 뒷담을 넘어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아군과 적군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 공수대원들은 잽싸게 시민군 사이로 섞여 들어오면서 난사했다. 시민군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새벽의 여명이 터오기 시작했다.
도청 민원실 2층, 시민군의 식당으로 사용하던 이곳 지하실의 무기고에는 다이너마이트가 저장되어 있어 윤상원 등 몇 명의 항쟁지도부 간부들과 사오십 명의 청년 학생들이 방어하고 있었다. 이들은 2층 난간을 중심으로 엎드려서 사격했다. 모퉁이에서 사격하던 고등학생 하나가 총에 맞아 비명을 내질렀고, 윤상원은 그쪽으로 기어갔다. “이봐, 정신 차려!” 그가 학생의 상반신을 껴안아 쳐들자 머리가 푹 꺾였다. 이미 죽은 것이다. 윤상원은 다시 자기 위치로 돌아와 엎드리기 직전에 쓰러졌다. 부근에 함께 있던 몇 사람이 그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윤형, 윤형”하고 불렀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옆구리에서 피가 흥건하게 흘러 나오고 있었다. 누군가 담요를 끌어다 그에게 엎어 주었다. 총알이 계속 날아왔고 사방에서 신음소리와 부르짖음이 들려 왔다. “실탄, 실탄이 없다!” 몇 사람의 생존자는 사무실 안으로 위치를 옮겼다.
공수부대는 벌써 2층 창 너머에까지 올라와 있었고, 창에다 총구만 올려놓고 연발로 갈겨댔다. 사무실 안의 시민군도 카빈 소총으로 창틀 바로 아래를 향해 단발 사격을 했다. 밖에서는 계속 항복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대항하던 시민군 측의 실탄은 곧 바닥이 나버렸다. 그들은 곁에 죽어 있던 동료의 총에서 탄창을 빼어 갈아 끼웠다. 얼마 되지 않아 그것마저도 떨어져 버렸다.
전투를 계속할 기운이 일시에 빠져나가면서 그대로 죽는 것보다는 혹시 항복하면 살려줄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생각이 항쟁 시민군들의 뇌리를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 “항복, 항복.” “무기를 거꾸로 창밖에 내밀어!” 곧장 창 너머로 뛰어든 공수대원은 그 방의 시민군을 구석에 엎드리게 하고 나서 실내의 곳곳에 연발사격을 퍼부었다. 옆방의 입구로 다가서더니 “모두 총을 버리고 기어 나와” 라고 외쳤다. 캐비닛 뒤에 숨어 있던 세 사람이 구석에서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공수대원은 그들을 한쪽을 밀어젖히고는 수류탄을 실내에 까 던졌다. 잠시 후 살아남은 채 난간에 모여진 시민군 포로는 10여 명쯤 되었다. 그들은 모두 손을 뒤로 결박당한 채 엎드려 있었다.
공수대원은 시민군의 M2 카빈 소총을 집어 들더니 왼손은 M16으로 겨눈 채로, 오른손은 카빈총을 쳐들어 도청 정문 쪽으로 필사적으로 도망 나가는 시민군 1명을 향해 발사했다. 시민군은 그 자리에서 픽 쓰러졌다. 바로 그때 8명의 시민군이 항복하겠다고 두 손을 번쩍 쳐들고 무장을 해제한 채 도청 앞뜰로 걸어나왔다. 방금 달아나던 시민군을 사살한 공수대원은 같은 자세로 8명의 투항자를 전원 사살했다. 그는 한쪽 발을 시민군 포로의 등에 올려놓고 사격하면서 “어때, 영화구경하는 것 같지”라고 농담을 던졌다.
도청 민원봉사실 2층 건물에 배치되었던 시민군은 모두 40여 명이었으나 그곳에서 최종적으로 붙잡힌 사람은 10여 명밖에 안되었다. 민원봉사실 2층에서는 다른 곳으로 피할 데가 없는 장소였으므로, 최소한 30~40명의 시민군이 전사했을 것이라고 생존자들은 증언했다.
같은 시각, 도청 본관에서는 뒷담을 타고 넘어 들어와 시민군의 전열을 교란시킨 공수대원 두 사람이 2층으로 올라왔다. 그들은 복도에 늘어서서 밖을 향해 사격하던 시민군들 틈에 슬그머니 끼어들어 정문의 양 옆 담벼락 아래 배치되어있던 시민군들을 쏘았다. 아래쪽에서는 동료 시민군이 자기들을 쏘는 줄 알고 쏘지 말라고 외치면서 쓰러졌다. 곧바로 2층으로 몰려 올라온 공수부대는 복도를 향하여 난사했다. 상당수가 전사했다. 그들 생존자는 모두 복도에 있으면 전멸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각 사무실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캐비닛과 책상으로 문에다 바리게이트를 쳤다. 복도에서는 계속해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고, 공수부대는 중앙 계단을 중심으로 다가들며 양 옆의 사무실을 수색하면서 다가왔다.
복도의 가운데쯤 사무실에 숨어 있던 시민군 두 사람은 문에다 총구를 겨누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들은 이미 실탄도 두세 발씩밖에 없었다. 그들은 의논했다. “항복하라는데 어차피 죽을 것 같으니 한 놈이라도 죽이고 죽자”고 한 사람이 말했으며 또 한 사람은 “아니야, 혹시 군사재판이라도 하고 사형시킬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되면 할 말이라도 하고 죽는 게 낫다”라고 친구를 설득했다. 바로 옆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또 다른 사무실에서는 시민군 3명이 캐비닛을 문 앞으로 바짝 밀어 놓고 속에 들었던 서류뭉치를 쌓아 엄폐물을 만들었다.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었다. 끝에서부터 수색해 들어오는 듯 수류탄 터지는 소리와 M16 소총의 연발사격 소리, 항복하라고 외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누군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면서 열어달라고 했다. 공수대원은 아닌 것 같아서 열어 주었더니 고등학생이었다. 그는 대변이 마려워 못 견대겠다고 했다. 학생은 사무실 구석에 가서 일을 치르고 있었다. “방안에 있는 폭도들은 총을 버려라. 일곱 셀 때까지 안 나오면 수류탄을 던진다!” 밖에서는 시민군 포로들이 기합을 받는 듯 여럿의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그들은 “항복하면 죽이지는 않는 모양인데” 하면서 밖으로 총을 내밀었다.
상당히 많은 수의 시민군 포로가 복도에 엎드려 있었다. 날이 훤해졌고 방마다 죽어 있는 시체들을 끌어냈다. 어떤 사람은 팔이 떨어져 덜렁거리는 채로 고통스런 비명을 내질렀다. 공수대원들은 시민군이 사무실 안에서 항복해 나올 때 총구를 시민군 자신에게로 돌리고 기어 나오도록 했고, 조금이라도 자세가 수상하면 사정없이 발사했다. 그들은 총을 빼앗자마자 군화발로 턱, 머리, 배 등 온몸을 힘껏 걷어차며 욕을 퍼부었다. 공수대원들은 시민군 포로의 등에다 ‘극렬’ ‘실탄 10발’ ‘권총소지’ 등 상부에서 지시받은 분류기준에 의해 매직펜으로 휘갈겼다.
시민군 포로들은 머리가 터져 피투성이가 되거나 안경이 깨져 실명을 하기도 했다. 포로들은 손을 뒤로 묶인 채 포복으로 계단까지 접근한 뒤에 계단에서는 짐짝처럼 그대로 굴러 떨어졌다. 전혀 고개를 들 수도 없었고, 도청 정문까지 그런 식으로 포복으로 기어나갔다. 그들은 도청 앞 광장에서 대기 중이던 군용 차량에 실렸다.
어제 시민군의 대변인과 인터뷰를 했던 외신기자들이 부근에 몰려들어 이런 장면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열심히 비디오를 녹화하고 있었다.
한편 YMCA에서는 이날 새벽 거의 동이 틀 무렵에야 계엄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YMCA 안에는 문화 선전조와 고교생들 그리고 근로자자들이 방어 중이었다. 계엄군은 전일빌딩 입구의 골목에서 기관총으로 한참이나 사격하고는 건물의 앞뒤로 진입했다. 3층에 있던 건물 직원이 “우리는 무기를 안 가졌다. 살려 달라”고 소리쳤고, 계엄군은 “모두 옷을 벗고 나오라”고 하면서도 M16을 발사했다. 여러 명이 사살되었다. 박용준은 YMCA 정문 근처와 우체통 뒤에 또는 집모퉁이에 숨어서 사격하던 공수대원들과 계속 교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층의 양서조합 사무실에는 바닥이 온통 핏물이 흥건히 고였고 서가의 책 속에는 탄환이 무수히 박혔다. 뒤이어 전일빌딩의 시민군들도 끝까지 항쟁하다 전원 전사했다.
항쟁의 피로 물든 아침이 밝아 왔다. 마침내 전우의 시체를 넘으면서 마지막 시민군들이 두 손을 쳐들고 나왔으며, 150여 구의 시체와 부상자가 두 트럭에 나뉘어 실려 나왔다. 생존자는 도청 방황자, 총기 소지자, 특수폭도로 분류되어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시민군 생존자들은 묶인 채 트럭에 실려 가면서 어둠 속에서 쓰러져 가던 동료들의 최후를 머리에 떠올렸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의의
광주 시민들이 죽음으로써 이루어낸 광주민중항쟁은 우리의 역사를 새로 일으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들었습니다.
광주, 미국을 말하다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미국이 절대적으로 선하기만 한 나라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은 ‘반미의 무풍지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국의 위상에 대한 어떠한 의문도 제기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광주민중항쟁의 첫 번째 의의는 이 같은 미국의 실제 모습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광주민중항쟁의 마지막 날을 앞둔 1980년 5월 26일, <민주화 투쟁 대학생 대책운동본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가두방송을 했습니다.
“지금 부산 앞바다에는 미 항공모함 두 대가 정박해 있습니다. 잔인무도한 저들의 살육이 더 이상 계속되는 것을 방지하고 광주 시민을 지원하기 위해 왔습니다. 시민 여러분, 안심 하십시오.”
실제로 당시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항공모함이 광주 시민을 구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항공모함은 광주 시민들을 도와주기 위한게 아니라 항쟁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것이라는 사실이 이후에 밝혀졌습니다. 그동안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준 ‘해방자’, 북의 남침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자유민주주의 수호자’로 인식되었던 미국의 모습이 여지없이 깨지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한국군의 작전 통제권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이 항쟁의 최종 진압을 위해 20사단의 광주 투입을 승인한 일이 알려지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한층 분명해졌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자국의 이익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며, 그 이익을 위해서는 학살을 방조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광주에서 일어난 학살에 대해 미국 또한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를 계기로 광주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나게 됩니다. 1980년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19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이 그것입니다.
이제 우리 민족의 장래는 우리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 땅에 판치는 미국 세력의 완전한 배제를 위한 반미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자. 먼저 미국문화의 상징인 부산 미 문화원을 불태움으로써 반미투쟁의 횃불을 들어 부산 시민의 자각을 호소한다. (82년 3월 18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당시 성명서) 우리 민주 학우는 전 한국 민중을 대표하여 미국 측의 광주 민중 학살 공범 여부를 묻고 군부독재 지지 철회를 요구하고자 주한 미문화원에 들어가야만 했다. 우리의 요구는 첫째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둘째 광주 학살 지원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 사과하라, 셋째 미국은 군부 독재에 대한 지원을 즉각 중단하라. (85년 5월 23일, 미문화원 점거농성 중 발표한 성명서 <우리는 왜 미문화원에 들어갔는가> 중)
이러한 싸움이 거듭될수록 사람들은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반대하는 데서 나아가 한미 간의 종속적인 관계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미치는 미국의 영향력은 막강하지만, 이러한 싸움들은 종속적인 한미 관계를 바로잡기 위한 돌파구가 되었습니다.
민중, 스스로 무장하고 항쟁의 주체로 나서다
항쟁 첫날인 5월 18일에 군부세력에 맞섰던 사람들은 주로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19일부터는 시위의 양상이 바뀌어 일반시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공수부대의 잔인한 폭력이 오히려 잠재되어있던 사람들의 민주화 의지를 분출시키게 된 것입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닥쳐오는 폭력 앞에 광주 시민들 역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돌과 화염병 등을 던지며 적극적으로 방어하였고, 시위 역시 적극적인 공세 양상을 보였습니다.
마침내 20일이 된 날, 항쟁은 모두가 나서는 전면적인 투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유치원에 다닐 법한 어린 꼬마의 손을 잡고 나온 할머니, 점원, 학생, 노동자, 가정주부, 요식업소 종업원 등 모든 계층이 온통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오후 7시경, 수많은 차량이 일제히 헤드 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면서 공수부대를 향해 돌진했습니다. 12톤 대형트럭과 버스 11대가 잇따랐고, 그 뒤로는 200여대의 영업용 택시가 금남로를 가득 매운 채 뒤를 따랐습니다. 차량 행렬은 어마어마한 분노의 파도처럼 밀려왔는데, 그것은 억눌려있던 민중의 힘이 한꺼번에 분출되어 나오는 장면이었습니다. 운수노동자들의 강력하고 하나로 통일된 행동은 스스로 자신의 온 생애를 역사의 전면에 던지는 아름다움을 보여준 순간이었습니다.
5월 21일, 공수부대의 집단발포로 엄청난 희생을 치른 광주시민들은 공수부대의 만행에 맞서 무장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화순지역으로 나간 시위대들은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광부들의 도움으로 무기고에서 다량의 총기와 탄약을 획득했습니다. 광주의 참상을 전해들은 화순의 광부들은 눈물을 흘리며 TNT저장고에서 다량의 다이너마이트와 뇌관을 주었으며 광부의 일부도 시위대에 가담하였습니다. 나주방면의 시위대는 나주경찰서와 금성동 파출소에서 카빈, 권총, M1소총 그리고 실탄을 노획했습니다. 전남방직과 호남전기의 예비군 무기고에서도 다량의 무기와 실탄을 노획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장성, 영암, 담양 등지에서 연이어 벌어졌습니다.
각종의 총기로 무장한 수백 명의 시위대는 광주 시민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시민군’이라 불렸습니다. 시민군의 대부분은 10대 후반과 20대였고, 다음으로 30대와 40대 후반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노동자, 목공, 공사장 인부 등 직접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거나 구두닦이, 넝마주이, 술집웨이터, 부랑아, 일용품팔이 등이었으며 고등학생과 예비군복을 입은 청장년층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민군들은 결사항전의 자세로 싸워 5월 21일 저녁 8시, 도청의 계엄군을 격퇴시키고 그들을 광주전역에서 완전 철수시키기에 이릅니다.
광주민중들은 목숨을 건 싸움을 통해 독재정권이 순순히 물러나는 법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하였습니다.
광주, 인간의 아름다운 본성을 보여주다
항쟁 당시, 국내 언론들에 의해 폭도로 매도당했던 광주 시민들은 외부와의 교통, 통신이 두절되어 완전히 고립된 가운데서도 경이로울 정도의 도덕심과 자율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외신기자들 또한 참상 속에서 이상하리만치 질서정연한 광주시민들의 생활을 목격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생활필수품이 크게 부족하자 광주시민들은 매점매석을 방지하면서 시내에 반입되어 있는 생필품을 최대한도로 활용했습니다. 쌀집에서는 한꺼번에 두 되 이상의 쌀을 팔지 않았고 담뱃가게 주인은 한 사람에게 한 갑씩만 담배를 팔았습니다. 시민들은 시내의 치안질서 유지를 위해 이유 없는 파괴행위를 금지시키고 경찰서와 은행, 관공서 등에 경비조를 배치하였습니다. 시민들은 학생과 시민군에게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었는데, 식품점과 슈퍼마켓, 약국 등에서는 음료수, 빵, 드링크를 무상으로 내놓았고 주부들은 동네별로 쌀을 모아 김밥을 만들어 시민군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병원에서는 항쟁기간 처음 며칠 동안은 엄청나게 밀려들어온 부상자들 때문에 피가 모자라서 곤란을 겪었지만, 이 사실이 알려진 후에는 헌혈하려는 시민들이 쇄도하여 혈액원마다 피가 남아돌 지경이었습니다. 은행이나 신용금고 같은 금융기관에 대한 사고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21일 노동청부근 청산학원 앞에서는 청년 한사람이 군용트럭을 몰고 와서 주변의 시민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구경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저놈들을 쳐부수기 위해 결사대를 조직합시다. 저와 함께 동행할 사람 열 명쯤 필요합니다. 저놈들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사람만 모이시오. 서방 쪽 주유소에 가서 휘발유 드럼통을 몽땅 실어다가 불붙인 차량을 도청으로 몰아붙여 버립시다.” 삽시간에 삼사십 여명이 모여들자 그는 다시 외쳤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필요 없습니다. 정말로 죽을 각오를 한 사람들만 나오시오. 나는 직접 차를 끌고 도청으로 돌진해 들어가겠소. 같이 죽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무도 비켜나려고 하지 않았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청년은 모두를 모아서 차를 타고 주유소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그들을 향해 공수부대가 도청 옥상에 설치한 기관총을 발사하기 시작하자 청년들은 벌집이 되어 죽어갔습니다. 모두 다 장렬하게 전사하였습니다.
광주, 승리의 역사를 새로 쓰다
계속 싸울 것인가 투항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24일 항쟁지도부 준비위원회와 수습대책위원회가 3시간여의 논쟁을 벌였는데 그 논쟁의 일부를 소개하겠습니다.
항: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수: 어떠한 명분에서도 더 이상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항: 피를 흘리지 말아야 된다는 점에서 동감이다. 그렇지만 지금 상태에서 무기를 반납하고 항복한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지겠는가?
수: 일단 계엄군을 믿어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정부당국과도 여러 가지 사후처리 문제를 협의해본다고 했다.
항: 계엄군을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 바로 엊그제까지 계엄군이 벌였던 잔혹한 학살은 우리가 무슨 죄가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시점에서 계엄군은 누구인가. 우리의 주장, 피 흘리며 죽어간 사람들이 외쳐댔던 요구사항은 한 가지도 관철되지 않았는데, 여기서 항복해 버리자는 말인가. 이것은 투쟁 과정에서 죽은 투사들을 매도해 버리는 일이다. 만약 우리가 여기서 항복한다고 하더라도 저들은 우리 광주 시민들을 더욱 많이 학살해 버릴 가능성도 없지 않다. 싸울 무기도, 사람도 명분도 잃어버리고 저들에게 학살과 진압의 명분만을 안겨주자는 말인가.
수: 우리도 역시 우리의 주장이 관철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 이상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 앞으로 싸움이 계속된다면 승산이라도 있단 말인가. 만약 이길 가능성만 있다면 나도 계속 투쟁하겠다.
5월 26일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도청 앞 광장에는 죽음 앞에서 일어선 최후의 전사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은 일부 수습위원들이 도청사수를 포기할 것을 권유하자 “그냥 이대로 총을 버리고 아무 저항 없이 계엄군을 맞아들이기에는 지난 며칠 동안의 항쟁이 너무도 장렬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시민들의 저항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도 누군가가 여기에 남아 도청을 사수하다 죽어야 합니다.” 라며 단호히 물리쳤습니다.
27일 새벽, 계엄군의 총성이 도청의 온 사방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한 청년이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며 “고등학생들은 먼저 총을 버리고 투항해라. 우리야 사살되거나 다행히 살아남아도 잡혀 죽겠지만 여기 있는 고등학생들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산 사람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빛나는 미래를 위해, 항쟁의 마지막을 자폭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자, 고등학생들은 먼저 나가라.”라고 말했습니다. 장내는 숙연해졌고 수류탄을 움켜쥐고 있던 고등학생들은 흐느껴 울었습니다.
도청을 끝까지 지킨 시민군은 목숨을 잃었지만, 이들이 지켜낸 것은 도청이 아니라, 항쟁 기간 동안 죽어간 사람들의 정의와 광주민중항쟁에 담긴 역사적 정당성이었습니다.
광주민중항쟁은 끝났지만 민중들이 보여준 위대한 저항정신과 인간 본연의 아름다운 모습은 여전히 우리 안에 큰 울림과 교훈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이 3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광주를 기억하고, 그 정신을 우리들 삶에서 본받으려는 이유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