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min read

철학에세이 2 —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다

첫째 마디 — 늑대는 늑대, 멧돼지는 멧돼지인가?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동물의 생태를 소개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 아프리카 밀림에 살고 있는 동물에서부터 시베리아의 추운 지방에 살고 있는 동물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에 있는 여러 동물이 나옵니다. 그 중에는 풀을 뜯어먹고 사는 초식 동물도 있고 다른 동물을 잡아먹고 사는 육식 동물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나운 육식 동물, 이를테면 사자가 순하디순한 사슴 같은 동물을 잡아먹는 장면을 보면 언뜻 이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만약 사자나 표범, 호랑이 같은 육식 동물이 없다면 저 약한 동물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을 텐데 하는. 약한 동물의 팔다리가 뜯기는 끔찍한 장면을 보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자나 호랑이, 표범 같은 육식 동물이 없어지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먼저 다음 이야기를 읽고 생각해봅시다.

한 농촌 지역이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주로 밭농사를 지어서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 주위에는 산이 많아 산짐승도 많았습니다. 특히 멧돼지와 늑대가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늑대가 밤이면 마을 주변에 자주 나타났기 때문에 주민들은 어두워지면 외출을 삼가고 꼭 외출해야 하는 경우에는 여럿이 무리 지어 다니곤 했습니다. 해만 지면 문을 걸어 잠그고 외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참다 못한 마을의 남자들이 총을 구입해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보이는 늑대마다 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며칠 동안 이렇게 하자 많은 늑대들이 잡혔고 간신히 실아남은 늑대들은 다른 곳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리하여 지역 주민들은 이제 밤에도 외출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을주민들이 모두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밭이 파헤쳐져 있고 심어 놓은 농작물이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장난이려니 생각했지만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또한 한 집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집이 그러했습니다. 지역 주민들은 곧 누가 이런 짓을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밭을 파헤치고 농작물을 먹어 치운것은 다른 사람의 장난이 아니라 산에서 내려온 멧돼지의 짓이었던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늑대를 잡거나 쫓아 버리자 멧돼지가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왜냐하면 멧돼지를 잡아먹고 살던 늑대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멧돼지 수가 마구 늘어나자 멧돼지들은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전처럼 산에서 나는 것들만으로는 먹고 살 수가 없게 된 것이지요. 그리하여 멧돼지들이 마을에 내려와 농작물을 파 먹느라 밭을 파헤쳐 놓았던 것입니다. 늑대는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었지만, 한편으로 멧돼지를 잡아먹음으로써 농가의 농작물을 보호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그런데 말을 사람들은 인간과 늑대의 관계만을 생각했지, 늑대와 멧돼지, 멧돼지와 인간의 관계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본래의 얘기로 돌아가서 만약 육식 동물이 없어진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초식 동물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서 밀림에 있는 풀이나 나무가 모조리 사라지고 결국 산림이 황폐해질 것입니다. 많은 초식 동물이 그것들을 뜯어먹기 때문이죠. 그래도 먹을 것이 부족하면 많은 동물이 굶어 죽을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산림이 황폐해지면 나무가 인간에게 제공하던 산소가 부족해져서 인간도 생활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육식 동물이 초식 동물을 잡아먹는 끔찍한 장면만 보고 육식 동물이 없어졌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잘못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텔레비전에서 보는 동물들은 이처럼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상호 작용하면서 살아갑니다. 인간 또한 이러한 동물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상호 작용하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런 관련을 무시하고 사물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앞에서 예로 든 지역 주민들처럼 큰 재난을 맞게 될 것입니다.

육체와 정신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종교는 흔히 육체와 정신을 분리해서 봅니다. 육체는 탐욕스러운 것으로 죄악으로 가득한 현실 세계에 속하며, 정신은 선만이 가득한 천국의 세계로 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육체와 정신은 서로 대립되고 분리되어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신도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뇌는 신체, 즉 육체의 일부분입니다. 육체가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정신도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체와 정신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심리학(인간의 정신활동을 연구하는 학문)을 공부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생리학(신체 기능을 연구하는 학문)을 도외시할 수 없습니다. 또한 생리학을 공부하는 경우에도 생물학(생물 일반에 관한 학문)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에 생물학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이라는 것은 생명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물질의 화학 반응을 무시하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므로 화학과도 연관성을 갖습니다. 화학은 분자의 결합과 분해라는 문제를 다루는데, 분자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원자를 연구하는 물리학과도 관련을 갖습니다. 또 물리학이 연구하는 여러 가지 요소의 기원을 탐구하다 보면 그 요소의 생성을 연구하는 지구과학, 또 지구가 그 일부분을 이루고 있는 태양계의 연구(천문학) 등과도 관련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과학은 서로 관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사회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사회에는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정치가, 노동자, 학생, 농민, 광부, 어부, 기업주 등이 있으며, 이 사람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여러 가지 직종의 일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은 각자 외따로 떨어져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생활합니다. 정치가는 국민의 여론을 반영하여 정치를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국민들의 생각이나 생활을 잘 알이야 합니다. 국민들로부터 분리된 정치는 결국 국민들에게 외면당하기 때문입니다. 노동자가 만들어 낸 생산물은 상품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제공됩니다. 만약 섬유공장의 노동자가 옷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옷을 입을 수 없을 것입니다. 농민이 쌀을 생산해 내지 않는다면 당장 먹을 것이 떨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배고품을 겪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상호 작용하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회의 각 분야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의 직업의식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예로 알 수 있는 것처럼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상호 관련을 맺고 상호 작용하면서 존재합니다. 만약 이런 관련성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자연이나 인간, 사회에 대해서 올바르게 인식할 수 없습니다.

자연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시물의 관련성을 인식함으로써 위대한 발견을 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유명한 토리첼리의 실험을 봅시다. 수은을 넣은 유리관을 거꾸로 하여 마찬가지로 수은이 담긴 그릇에 세워 놓으면, 관 속의 수은이 아래로 내려가다가 그릇의 수은 면보다 높은 일정한 곳에서 멈춥니다. 이러한 현상을 주위의 조건과 분리해서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관이 세워져 있는 그릇의 수은 표면이 주위의 조건과 분리되어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기와 접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관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주위 조건의 관련성을 생각하면, 그릇에 있는 수은의 표면에 대기의 압력(기압)이 가해지기 때문에 관속의 수은이 어느 일정한 높이에서 멈추어 그 밑으로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토리첼리는 이처럼 주위 조건과 수은 관 현상의 관련성을 인식함으로써 대기에 압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처럼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이 맺고 있는 관련성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올바르게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관련성을 무시하고 이에 반대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각각 고립적으로 분리되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늑대는 늑대, 멧돼지는 멧돼지’이며, 이들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식의 주장이지요. 그들은 한 예로 ‘스포츠는 스포츠, 정치는 정치’라고 주장합니다. 스포츠와 정치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스포츠와 정치가 아무런 관련이 없을까요? 사실 스포츠와 정치는 다른 것입니다. 분명히 서로 차이가 있고 그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스포츠는 스포츠, 정치는 정치’라고 말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올바릅니다. 하지만 스포츠와 정치가 전혀 관계가 없고 따라서 서로 완전히 독립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만약 국가의 재정이 넉넉지 못하여 운동장 시설이나 수영장 같은 것을 건설할 수 없다면 스포츠는 발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스포츠와 정치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련을 맺고 상호 작용합니다. 그러므로 ‘스포츠는 스포츠, 정치는 정치’라는 식으로 양자의 관련성을 무시하는 견해는 현실을 무시한 견해로서 올바른 견해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노동자, 농민, 학생, 상인 등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은 정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미국 제16대 대통령 링컨은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민주주의를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고 정의하였는데, 이는 사회 전 구성원의 자발적인 참여 없이는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고, 정치가 사회를 이루는 각 구성원의 삶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노동자는 노동자, 농민은 농민, 학생은 학생, 정치는 정치’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각자 맡은 일이나 열심히 하고 정치에는 신경 쓰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노동자는 공장에서 열심히 물건이나 만들어 내고, 농민은 땅이나 파고, 학생은 공부나 하고, 그러면 정치는 정치가가 알아서 다 해 준다는 식의 논리입니다. 사실 이런 식의 주장은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꽤 널리 퍼져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국가>에서 인간을 이성적 인간, 기력적 인간, 정욕적 인간의 세 부류로 나누고 이성적 인간 집단이 정치를, 기력적 인간 집단이 국가 방위를, 정욕적 인간 집단이 생간을 담당하는 것이 이상 국가이며, 이성적 인간 집단의 덕목은 지혜, 기력적 인간 집단의 덕목은 용기, 정욕적 인간 집단의 덕목은 절제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플라톤이 살고 있던 고대 그리스 사회는 노예제 국가로서 노예를 소유한 계급인 귀족과 무사, 평민, 노예라는 신분적 계급 관계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중 정치권력을 장악한 귀족이 평민과 노예를 지배ㆍ억압ㆍ착취하고 있었는데, 플라톤은 그 자신이 귀족으로서 그리스 귀족계급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플라톤은 귀족 계급의 지배와 권력을 유지시켜 주는 노예제 국가를 영원히 지속시키고자 ‘이상 국가론’ 이라는 주장을 펼쳤던 것입니다.

우리는 고대 중국의 공자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보게 됩니다. 공자는 명분(名分)을 내세워 군주와 신하, 백성이 각각의 본분을 지켜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천하가 어지러워진다고 주장했습니다.

플라톤과 공자의 주장을 오늘날에 적용해 보면,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와 민중은 생산에 힘쓸 것이며 정치는 정치가가 알아서 잘할 것이니 관심 갖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틀린 이야기입니다. 사실 노동자와 정치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1945년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을 제조하는 데 참가했던 미국의 과학자 존 힐튼의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과학이 사회와 인간과 얼마나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가에 대해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바가 많습니다.

나는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 폭탄을 제조하는 데 직접 참가한 사람입니다. 지금은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랄 만한 파괴력으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 버린 끔찍한 폭탄을 제조하는 일에 내가 참가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내가 원자 폭탄 제조하는 일을 맡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내가 ‘과학을 위한 과학’이라는 잘못된 철학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철학은 근대 과학의 독소입니다. 나는 과학을 사회생활이나 인간으로부터 분리하여 생각했기 때문에 전쟁 중에 원자 폭탄의 제조에 참가했던 것입니다. 우리 과학자는 ‘순수 과학’에 헌신해야만 한다, 그 나머지는 기술자나 정치가의 일이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과학은 인류의 이익에 도움이 될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나에게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수많은 사람의 죽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면 인류에게 커다란 이익이 돌아옵니다. 원자력 발전소라든가 원자력을 이용한 질병 치료 같은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하지만 원자력을 이용해서 만든 폭탄은 지구상에 있는 그 어떤 무기보다 훨씬 큰 파괴력으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만약 지구상에 현존하는 팩폭탄이 일시에 터진다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이 없어질 것입니다. 풀 한 포기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존 힐튼은 원자 폭탄의 제조에 자신이 참가하게 된 동기가 ‘순수 과학’이라는 미명 아래 과학을 사회나 인간으로부터 분리하여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과학의 의미도 사회나 인간과의 관련성 속에서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사물은 상호 관련을 맺고 상호 작용합니다. 만약 이 관련성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올바르게 인식할 수 없으며 나아가 현실에 대하여 잘못된 태도와 행동 양식을 갖게 될 것입니다.

둘째 마디 — 바람이 불면 통 장수가 돈을 번다

우리 생활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 가를 한번 살펴봅시다. 우선 생활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먹을 음식이 있어야 하고, 입을 옷이 있어야 하고, 살 집이 있어야 합니다. 보통 이것을 의식주(衣食住)라 말하지요.

그런데 우리가 먹는 음식은 어디에서 누가 만들까요? 그야 물론 농촌에서 농부들이 땀 흘려 생산해 냅니다. 농부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농사지은 곡식을 가져다가 우리가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물 중에는 외국에서 생산된 것도 있는데 이것은 외국의 농부들이 생산한 것입니다. 우리가 입는 옷은 봉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생산해 냅니다.

봉제 공장 노동자가 생산해 낸 옷의 일부는 우리나라 국민이 입고 일부는 외국에 수출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옷이 미국이나 유럽,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세계 곳곳으로 수출되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입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은 건설 노동자가 만들어 냅니다. 또 이때 부족한 재료는 외국에서 수입하기도 합니다. 호화 저택의 대리석 같은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이처럼 우리 생활을 돌아보면 우리가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밀한 것만 보더라도 농촌의 농부, 봉제 공장 노동자, 건설 노동자, 외국의 농부 등과 관계를 맺으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렇지 만약 자세히 살펴본다면, 우리가 이 세계의 모든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생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정신적인 면에 대해서 살펴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양식이라고 해서 읽는 책은 학자나 저술가 들이 쓴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학자나 저술가는 오로지 자신의 독창적인 머리로만, 다른사람의 영향은 받지 않은 채 그 글을 썼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축적된 선조들의 문화적 유산이나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의 사상, 학문적 업적, 또는 외국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 글을 쓴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은 그 책을 쓴 저자하고만이 아니라 그 뒤에 숨어 있는 많은 사람들과도 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는 우리에게 밝은 햇빛을 줍니다. 또한 햇빛을 받아 식물이 자람으로써 우리는 먹을거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바다는 우리에게 많은 해산물을 주고 편리한 항로를 제공합니다. 산은 나무나 석탄 같은 연료를 주고, 나무는 대기에 있는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이고 산소를 배출함으로써 공기를 맑게 해 줍니다.

지금까지 말한것처럼 우리는사회적ㆍ정신적ㆍ자연적으로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사회적ㆍ정신적ㆍ자연적으로 외계의 사물과 관계를 맺으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물은 상호 관련을 맺고 있다”는 주장은 옳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그 자체로서 독립하여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계 사물과 관계를 맺으면서 존재합니다.

그러나 관련성만을 강조하면 단편적인 사고방식에 빠져버립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일본 속담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통 장수가 돈을 번다.” 언뜻 이해가 안 되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 말이 나왔는지 살펴봅시다. 바람이 분다 → 모래가 날린다 → 모래가 사람의 눈에 들어간다 → 장님이 많아진다 → 장님이 샤미센(일본의 악기로 고양이 가죽으로 만듦)을 연주해서 돈을 벌어 생활한다 → 샤미센에 쓰이는 고양이 가죽이 많이 필요해진다 → 고양이 수가 줄어든다 → 쥐가 늘어난다 → 쥐가 통을 갉아먹는다 → 통 주문이 늘어난다 → 통 장수가 돈을 번다. 이 논리에 따라 “바람이 불면 통 장수가 돈을 번다”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이 말이 우리의 현실 경험에 합치할까요? 이 말을 곰곰이 따져 보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껴집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경험과 합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논리는 그럴듯한데 막상 우리의 현실 경험과 비교해 보면 석연치 않습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바람이 불면 모래가 날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영화에서 사막에 돌풍이 일어 모래 기둥이 생기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시의 포장된 도로에서도 바람이 불면 모래가 날릴까요? 약간 날릴 수는 있겠지만 깨끗한 도로라면 모래가 거의 날리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도시에 산다면 바람이 분다고 꼭 장님이 되지는 않습니다. 설령 모래가 많이 날리는 곳에 산다고 하더라도 안대를 한다든지 모래 바람을 피한다든지 해서 장님이 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바람이 불면 모래가 날려 장님이 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면 사막에 사는 사람은 모두 장님일 것입니다. 분명히 바람이 불면 모래가 날리고 그 모래가 사람 눈에 들어가면 장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설령 모래가 눈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치료를 받으면 장님이 되지 않을수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바람이 불면 모래가 날리는 것과 장님이 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관계를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바람이 불어 모래가 날리면 장님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다음의 논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장님이 되면 샤미센을 연주해 생활한다는 논리입니다. 실제로 거리에서 기타나 하모니카를 연주해서 생활하는 장님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장님이 이런 방식으로 생활하지는 않습니다. 그들 중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를 극복하고 정상적인 시력을 갖춘 사람과 똑같이, 아니 더 훌륭하게 사회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장님은 샤미센을 연주해서 생활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장님과 샤미센은 한편으로는 관계를 가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다음으로 샤미센과 고양이 가죽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샤미센을 만들기 위해 가죽이 많이 필요하게 되면 고양이 가죽으로 만든 샤미센 뿐만 아니라 개의 가죽, 쇠가죽 등으로 만든 샤미센도 생길 수 있습니다. 또한 고양이 가죽만이 필요하다면 이에 따라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므로 반드시 고양이가 줄어들어 쥐가 늘어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통 장수가 반드시 돈을 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설령 고양이가 줄어 쥐가 늘고 쥐가 통을 갉아먹어 새 통이 필요하게 된다 하더라도 통에는 나무로 만든 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쇠로 만든 통도 있고 플라스틱으로 만든 통도 있으므로 반드시 통 장수가 돈을 번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한 이야기로 미루어 볼 때 “바람이 불면 통 장수가 돈을 번다”라는 말이 현실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한 사람은 어떤 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을까요? 그것은 사물의 관련성만을 보고 관련되지 않은 부분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바람이 일으킨 모래와 장님의 관계에서 현실적으로 바람이 불어 모래가 날리면 장님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데 장님이 되는 경우만을 강조한 것입니다. 또한 장님과 샤미센의 관계에서도 장님이 되면 거리에서 샤미센을 연주해서 생활할 수도 있고 다른 방법으로 살 수도 있는데 샤미센을 연주해 생활하는 것만을 강조한 것입니다. 샤미센과 고양이, 고양이와 쥐, 쥐와 통 장수의 경우에도 이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즉 사물이 관계되어 있는 부분만을 보고 관계되어 있지 않은 부분은 보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사물이 관계하고 있음과 동시에 관계하고 있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물의 관계된 부분만을 강조하면 “바람이 불편 통 장수가 돈을 번다”라는 식의 현실에 맞지 않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사물은 관계하고 있음과 동시에 관계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철학적으로는 ‘상대적 독립’이라고 말합니다. 절대적 독립이라 한다면 아무 관계 없이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을 말히지만, 상대적 독립은 한편으로는 관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관계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들어 가면서 이야기해봅시다.

은으로 만든 조그만 공 모양의 덩어리가 있다고 합시다. 이 공모양의 덩어리에 압력을 가하면 얇은 은박지가 됩니다. 이때 은의 체적은 변하지 않지만 표면적은 변합니다. 이 경우 체적과 표면적은 서로 분리할 수 없지만, 한쪽이 다른 쪽에 관계없이 일정한 한계 내에서 변화할 수 있습니다. 즉 체적과 표면적은 한편으로는 관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관계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체적과 표면적은 상대적 독립 하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일생을 통해서 한 명의 같은 사람이라는 점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사람의 이름을 들으면 “아! 그 사람!” 하고 말하게 되고, 또 그 사람을 언제 어느 때 만나더라도 예전 그 사람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에서 청년으로, 청년에서 장년으로, 장년에서 노인으로 변합니다. 이에 따라 그가 입는 옷의 크기도 달라지고 하는 일도 달라집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모습은 변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그 사람을 옛날의 그와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은 사람이지만 그 겉 모습이나 하는 일이 변한 것뿐입니다. 즉 사람의 본질적인 면과 현상적인 면은 상대적 독립 하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음 그림을 봅시다.

A 그림은 누가 보더라도 도둑이 경찰에게 끌려가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B 그림은 어떤 그림일까요? 언뜻 보면 도둑이 경찰을 잡아 끌고 가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그림은 가짜 경찰이 사복 경찰에게 끌려가는 모습입니다. A 그림과 B 그림은 내용적으로는 같지만 외관으로는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본질과 현상은 상대적 독립 하에 존재한다.”

예를 하나만 더 들어 봅시다. 책상 위에 죽은 친구의 사진이 걸려 있다고 합시다. 인물 사진이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찍히는 인간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죽은 친구의 사진은 카메라 앞에 섰던 친구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진이 찍힌 뒤 그 친구의 모습이 바뀐다든지 혹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지라도 그것에 관계없이 그 사진은 존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그 친구와 사진은 서로 관계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친구와 사진은 관계하고 있음과 동시에 관계하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친구와 사진은 상대적 독립 하에 존재한다고 합니다.

앞에서 몇 가지 경우의 예를 들었지만 사실 모든 사물은 상대적 독립 하에 존재합니다. 상대적 독립이란 서로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한데도 한쪽이 다른쪽과 관계없이 일정한 한계 내에서 변화할 수 있는 관계를 말하며, 모든 사물은 이러한 상대적 독립 하에 존재합니다.

이런 상대적 독립은 인간의 정신구조에서도 나타납니다. 우리 주위에는 각각의 문제를 대할 때 서로 다른 태도로 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회사 동료라든지 친구들을 대할 때는 매우 민주적인 사람이 여성 문제에 대해서는 봉건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경우를 혼히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인색하게 구는 사람이 자기 자녀에게는 정반대로 아주 인정 많은 아버지인 경우도 있습니다. 실험실에서는 아주 과학적인 태도로 사물을 분석하고 실험하고 관찰하는 사람이 실험실만 나오면 비과학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정신구조도 상대적 독립의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식도 상대적 독립 하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정신구조와 의식이 상대적 독립 하에 존재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정신구조가 매우 다면적이며 정신구조의 각 부분이 불균형하게 발전한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한 인간의 의식 속에 서로 용납될 수 없는 두 가지 사고방식이 함께 자리잡고 있는 경우조차 있습니다. 이성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지지하면서 도덕적 관념은 봉건적이고 개인의 출세라는 이기주의적 목적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이 상대적 독립 하에 있음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정신구조의 어떤 부분에 문제가 있는가를 알고 그 부분에 정신적인 자극을 줌으로써 전체적으로 정신혁명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물은 관련을 맺고 있는 동시에 상대적 독립 하에 존재합니다. 즉 관계하고 있음과 동시에 관계하고 있지 않으며 그것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한쪽은 다른 쪽에 관계없이 일정한 한계 내에서 변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상대적 독립을 무시하면 일면적 사고방식에 빠져 사물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없고, 따라서 올바르게 행동할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모든 사물은 상호 관련을 맺고 상호 작용을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이해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다른 사물이나 현상과의 연관속에서, 또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조건 속에서 고찰해야 합니다. 만일 이러한 연관을 고려하지 않고 시간과 공간, 조건을 떠나 고립적으로 고찰한다면 우리는 결코 그 시물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어떤 사물이 주위 사물과 맺고 있는 연관과 그것의 상호 작용을 고찰해 보면 그 사이에 무수한 연관이 있어 복잡하게 관계를 맺고 있음을 발견합니다.사실 아무리 조그맣고 단순한 사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주위 사물과 맺고 있는 연관은 복잡하기 그지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 무수한 연관들이 모두 똑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각각의 연관이 그 사물과의 연관 속에서 일으키는 작용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수하고 복잡한 연관 가운데 본질적인 연관과 비본질적인 연관, 주요한 연관과 부차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어떤 시물을 이해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여러 가지 연관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어느 것이 주요하고 본질적인 연관이며 어느 것이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연관인가를 가려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사물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곧 법칙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순망치한(脣亡齒寒, 잎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이 말에 얽힌 이야기는 우리에게 사물의 연관성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 줍니다.

춘추 시대에 진나가 헌공은 괵나라가 변방에 자주 출몰하여 백성들을 괴롭히므로, 군대를 파견하여 한번에 괵나라를 멸망시키고자 중신들과 이 일을 상의했습니다. 대신들 중 대부 순식(筍息)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괵나라와 인근의 우나라는 이와 입술의 관계이므로 괵나라를 토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나라에 괵나라를 토벌하고자 하니 길을 빌려 달라고 하여 먼저 괵나라의 항복을 받은 다음에 이어서 우나라를 공격함이 옳은 줄 아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헌공은 우나라가 과연 길을 빌려 줄 것인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가 결정을 못 하고 망설이자 순식이 계속해서 “만일 보석과 좋은 말을 보내기만 한다면, 욕심 많은 우공이 반드시 응낙할 것입니다”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물건은 헌공 또한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것이라서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이에 순식은 “괵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우나라 또한 존재할 수 없을 것인즉, 좋은 말과 보석은 잠시 빌려 주는 것에 불과합니다”라고 설득해 결정을 재촉했습니다. 결국 순식에게 설득된 헌공은 많은 보석과 말 등의 예물과 함께 사자를 우나라로 파견했습니다.

귀중한 예물을 받은 우공은 크게 기뻐하며 즉시 길을 빌려 주겠다고 확답했습니다. 이때 대신 궁지기(宮之奇)가 극력 반대하며 간언하기를, “속담에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우나라와 괵나라 사이는 이처럼 이와 입술의 관계에 있사온즉, 괵나라가 망하면 우리나라도 안전을 보장하기가 어렵습니다. 진나라에 길을 빌려 주는 것은 천만 불가합니다. 폐하, 재고하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공은 궁지기의 간언을 물리치고 예물을 받아들이고 진나라에 길을 빌려 주었습니다. 궁지기는 절망한 나머지 우나라를 떠나 버렸습니다. 그는 떠나기 전에 “앞으로 1년 안에 우나라는 반드시 멸망하고 말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진나라 군사는 우나라를 거쳐 단숨에 괵나라를 공략했습니다. 괵나라는 진나라가 우나라를 거쳐 공격해 오리라고 상상도 못 하여 전혀 방비가 없었기 때문에 저항 한번 못 하고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진나라가 괵나라를 멸한 뒤 돌아올 때 우공은 진나라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하여 친히 성 밖까지 나와서 진나라 군사들을 영접했습니다. 이때 우공을 호위하는 병사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방어가 소홀한 것을 본 진군은 우나라를 갑자기 공격하여 우공과 대신들을 체포했습니다. 진나라 군사들이 침략군으로 돌변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 했던 우공은 제대로 대항조차 못 한 채 포로가 되었습니다. 전나라 군사들은 헌공이 우공에게 보낸 보석과 말을 찾아냈습니다. 그때서야 우공은 탄식하며 궁지기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