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특권층을 말한다 — 법률가의 탄생
법률가의 탄생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떤 형태로든 이를 창설할 수 없다. (헌법 제11조 제2항)
특권의 내면화
10여 년 전만 해도 사법시험 합격자 발표가 나면 수석, 최고령, 최연소 합격자들 이야기가 신문 지면을 장식했습니다. 그들이 어떤 역경을 딛고 그 자리에 섰는지 등 감동적인 사연이 소개된 후에는 대개 "왜 사법시험에 도전했는가?" 라는 무의미한 질문이 던져졌고, 대부분의 합격자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해서" 라는 모범답안을 내놓곤 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한 분들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했습니다. 요즘은 그런 보도도 줄었고, 합격자들의 답변들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최근 유행은 "국제 변호사가 되어 국제무대에서 활동하고 싶다." 거나 "통상 전문가가 되고 싶다." 는 쪽으로 흐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하게 되었음을 반영하는 변화겠지요.
가끔 그 옛날의 합격자 인터뷰들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해 사법시험을 준비했다던 그 많은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라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처음부터 통상 전문가를 꿈꾸는 요즘의 세련된 합격생들은 논외로 치더라도, 지금 법조계 물을 먹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때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한 삶’을 꿈꾸었던 사람들입니다. 신문 인터뷰를 하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이야기했던 법조인들만이라도 자기 약속에 충실했다면 시민과 법 사이의 엄청난 괴리 현상이 조금 완화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법시험이라는 장벽을 넘어 들어간 곳에서는 ‘새로운 세계’ 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새로운 세계는 결코 그들에게 특권을 향유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특권과 특권의식은 가랑비처럼 소리 없이 그들의 삶 소게 젖어들었습니다. 새로운 세계의 법과 논리는 그 나름대로 완결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 흐름에 저항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저도, 저의 동료들도 그렇게 서서히 변화해 갔습니다.
사법연수원은 우리나라 법조인들의 요람입니다. 서울대 사법대학원에서 사법시험 합격생들을 위탁받아 교육하던 1970년대 이전의 법조인들을 제외하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법조인들이 사법연수원에서 공부한 사람들이지요. 제11회 사법시험 출신들이 사법연수원 제1기생이 되었기 때문에 사법시험 횟수와 사법연수원 기수 사이에는 10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1991년 시험에 합격한 제 경우, 사법시험으로는 33회이고 사법연수원은 23기가 되는 것입니다. 제33회 사법시험은 모두 289명의 합격자를 배출했고, 사법연수원 23기는 291명이 수료했습니다. 숫자가 약간 차이나는 이유는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연수원 입소를 미루었다가 후에 들어왔거나, 건강상의 이유로 중간에 퇴직했다가 다시 들어온 사람들이 있는 까닭입니다.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故조영래 변호사의 경우처럼, 사법연수원 재직 중에 시국사건으로 구속되어 실형을 살고 나서 한참 후 다시 사법연수원에 들어와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예외적인 사례도 있습니다. 조 변호사는 사법시험 횟수는 13회이지만, 징역, 수배 등으로 8년을 손해 본 까닭에 사법연수원은 사법시험 21회와 함께 11기로 수료했지요.
사법시험 횟수 및 사법연수원 기수는 법조인으로서 어떤 사람의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는 가장 간편한 수단입니다. 서열을 중시하는 법원, 검찰뿐만 아니라 변호사 사회에서도 사법연수원 기수는 그 사람의 법조 경력과 능력을 간접적으로 말해줍니다. 담당 판검사와의 관계가 볗노사 개인의 능력보다 더 중요한 사건 수임 요건이 되는 우리 법조 풍토에서는 동기생들의 성장이 곧 나의 성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몇 년 전에는 판검사들과 친한 변호사들을 쉽게 골라 선임할 수 있도록 담당 판검사와 변호사의 관계를 점수로 환산하는 희한한 데이터베이스까지 인터넷 유료서비스로 등장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예를 들어 A라는 검사와 제가 사법연수원을 함께 다녔다면 검색 결과 2점을 받게 됩니다. 고등학교까지 함께 다녔다면 거기에 3점이 추가되고, 대학을 함께 다녔다면 또 2점이 추가, 군법무관을 함께 했으면 또 2점이 추가됩니다. 고교, 대학, 연수원, 군대 등을 모두 함께 마쳤다면 대략 9점 정도를 받게 되지요. 이 점수가 높아질수록 당연히 두 사람 사이의 친밀감도 증가합니다. 언젠가 동료들과 이 데이터베이스 이야기를 하며 “너와 나의 관계는 몇 점짜리” 라며 농담을 주고받은 적이 있습니다. 불행이도 이 데이터베이스의 점수는 상당히 정확했습니다. 아무래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일수록 쉽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법조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데이터베이스인 셈이지요.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에 들어가는 순간, 저는 법원에 소속된 5급 공무원으로서 신분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최하 호봉을 받기 때문에 월급은 많지 않았지만 5급은 행정부 사무관에 해당하는 상당히 높은 직급입니다. 그리고 사법연수원 1년을 마치고 2년차가 되면서는 직급이 다시 올라가 4급이 되었습니다. 보통 행정고시에 합격한 사무관이 4급 서기관이 되는데 10여 년이 소요되는 것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승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모두 판사와 검사가 3급의 예우를 받는 데 따른 것입니다. 연수원 1년차 때 5급, 2년차 때 4급을 해야 연수원 수료와 동시에 3급에 상당하는 자리로 가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사법연수원생들에게 너무 높은 직급을 부여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법연수원이라는 이유로 주어지는 특권이 너무 많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특권의 대부분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를 바라보는 주변의 눈이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4학년 때 사법시험에 합격한 약 20여 명의 동기생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연수생들이 고시 공부에 3~4년을 꿇어 박은 사람들이었습니다. 2~3회에서부터 20여 회에 이르기까지 고시 실패 경력도 다양했습니다. 고시 낙방 경험이 있는 연수생들은 과거 한때 스스로를 벌레처럼 느끼는 경험을 해본 사람들입니다. 주변사람들이 모두 “저 녀석은 벌써 두 번이나 시험에 떨어졌네. 누가봐도 안 될 놈 같은데 괜히 고시 공부한다며 폼을 잡고 있어.” 라고 자신을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두 번까지는 그나마 참을 수 있지만, 몇 번 더 시험에 떨어지고 나니 세상을 보기가 두려워졌습니다. 빨리 취직하라는 가족들의 압박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대학입시에 실패해본 사람이라면 다 알 겁니다. 세상이 모두 자신을 향해 등을 돌린 것 같은 느낌……. 그런데 그런 실패 경험을 서너 번 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누구라도 정상일 수 없습니다. 자신이 바퀴벌레나 파리처럼 느껴지는 시험에서 합격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이전과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이전에 자신을 우습게보던 주변 사람들은 “그 친구가 역시 뭐가 달라도 달랐어.” 라며 축하와 경의를 표합니다. 가족들은 선조의 묘소에 모여 만세를 부릅니다.
신분이 수직으로 상승하는 이런 경험은 우리들의 정신세계에 충분히 나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날부터 습관적으로 “뭘요, 저는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라고 겸손한 척하는 법도 배우지만, 이미 시험 합격자의 내면에 ‘나는 남과 다르다’ 는 의식이 자리 잡은 후입니다. 스스로를 벌레처럼 느끼게 하던 심리공간을 특권의식이 메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늘 겸손한 사람이지만 내면세계는 ‘땅값 상승으로 한몫 잡게 된 졸부들’ 의 그것과 갈수록 비슷해져 갑니다.
이때 나타나는 사람들이 바로 마담 뚜 아줌마들이지요. 사법연수원에 들어간 며칠 뒤부터 우리 집에는 ‘김두식 연수생 어머니’를 찾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줌마들의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마담뚜들은 절대 사법연수원 본인과 직접 거래함으로써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주된 목표는 어디까지나 어머니들이었습니다.
사법연수원에 들어간 초기에는 친구들과 이런 마담뚜 아줌마들 이야기로 웃음꼿을 피운 적이 많았습니다. 누구는 빌딩 한 채를 제안받았다고 했고, 누구는 최소한 10억을 지참금으로 보낼 거라는 약속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는 허리를 구부려 가며 웃었지요. ‘공식적으로는’ 이런 마담뚜의 아줌마들의 혐오의 대상이었고, 마담뚜의 도움으로 결혼을 하게 될 사람은 하나도 없어보였습니다. 우리가 순진했던 것이죠. 이런 이야기를 듣는 동안 우리 머릿속으로 알게 모르게 ‘우리는 얼마짜리’ 라는 생각이 자라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에는 하나, 둘, 신붓감을 설명할 때 ‘신부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야기하는 대신, 묻지도 않은 ‘신부 아버지의 신분과 직업’을 이야기하는 연수생들이 늘어갔습니다.
적지 않은 동료들이 마담뚜의 도움을 받아 결혼에 성공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돈에 팔려 결혼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사법시험 합격 이전에 사귀던 사람이 있는 연수생들은 보통 그 아가씨들과 결혼했습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오랜 고시 공부기간 동안 뒷바라지해준 애인을 버리고 부잣집 딸을 선택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마담뚜 문화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변의 총각들이 하나씩 여유 있는 집에 장가가서 좋은 집과 자동차를 장만하는 것을 볼 때마다 우리는 “그 친구가 그럴 줄 몰랐다” 며 한탄했지만, 은연중에 ‘나도 그 정도는 받을 수 있는 사람’ 이라는 의식이 싹터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혐오 속에서 내면화되는 특권의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영혼을 좀먹는 법조계의 논리
서서히 내면화되는 특권의식과 함께, 늘 1등을 지향하는 수재들은 법조계 내부를 지배하는 몇 가지 논리에 순응해가기 시작했습니다. 법조계 내부의 제1논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판검사 임용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법연수원 시절 내내 우리들은 부장판사와 부장검사로 구성된 교수님들로부터 ‘임용을 못 받으면 끝장’ 이라는 세뇌교육을 받았습니다. 사법연수원 수료 후 바로 변호사로 나가게 되면 수임에서도 고생을 하고 전관예우도 못 받고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만 해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를 아껴주시던 지도교수(부장판사)님은 제가 딴 생각 하는 것을 여러 번 나무라시며 “김 시보가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후회한다. 무조건 판검사 임용을 받도록 공부하라” 고 말씀하셨지요. 이런 분위기에서는 누구라도 자신이 왜 판검사가 되려고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를 갖기 힘듭니다. 사법시험을 준비할 때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변호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더라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그래도 일단 임용 받을 수 있는 성적은 확보하고 변호사를 하더라도 하자.” 라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사법시험 합격자 수가 1000명에 이른 지금은 제1논리가 더욱 강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제1논리와 함께 가는 것은 “좋은 일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는 제2논리입니다. 이런 저런 꿈을 가진 연수원생에게 선배들은 현실의 벽을 이야기하며 ‘일단 너의 위치부터 확보한 다음 좋은 일을 해라’ 라고 충고합니다. 제1논리와 제2논리는 동전의 앞뒷면과도 같습니다. 실력을 더 쌓고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는 핵심 수단은 바로 임용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력을 더 갖춘 다음에 네가 하고 싶은 좋은 일을 하라.” 는 것은 사법연수원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아주 중요한 이데올로기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어떤 고등학생이 공부 못하는 친구의 공부를 도와주거나, 장애인 친구의 등하교를 돕기로 마음먹었다고 칩시다. 당장 그 학생은 부모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물론 네가 좋은 마음으로 그 일을 시작한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거다. 지금은 네 공부에 주력해야 할 때고, 좋은 일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다. 네가 만약 지금 공부에 주력하지 않아서 대학입시에 실패한다면, 나중에 너는 진짜로 누구를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우선 실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일단 선한 일 하기를 뒤로 미뤄놓고 그 학생이 ‘좋은’ 대학 법학과에 진학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웃을 돕고자 하던 원래 꿈을 이룰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네가 하려고 하는 일이 옳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는 거다. 지금 네가 고시 공부를 그만 두고, 학생운동에 뛰어든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니? 고시에 한두 번 떨어지더니 공부하기 싫어서 그런다고 하지 않겠니?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거다. 우선 고시부터 붙고 나서 남을 돕는 일에 나서도 늦지 않다. 지금은 네가 아무리 자유와 평등을 떠들어봐야 누가 네 말에 귀 기울여주냐? 변호사 타이틀이라도 가진 후 뭔가를 말하는 것과 그냥 평범한 학생으로 말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먼저 너 자신부터 남들이 귀 기울여줄 만한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
자, 이 학생이 열심히 노력해서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칩시다. 이번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이쯤에는 충고하는 분이 부모님에서 장인어른으로 바뀌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갖춘 장인께서는 아마도 이렇게 말씀하시겠지요.
“변호사는 원래 연수원에서 판검사로 임용될 성적이 안 되는 사람들만 하는 거라면서? 자네, 그렇게 성적이 좋지 않은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다는 건 참 좋은 뜻이야. 하지만 세상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네, 자네 무슨 돈으로 개업을 할 건가? 그리고 자네가 아무리 ‘나는 성적이 되지만 그래도 변호사를 택했다’ 고 말한다 한들 사람들이 그 말을 믿어줄 것 같은가? 아무리 자네 뜻이 그렇다 하더라도, 우선은 판검사 임용을 받은 후 나중에 변호사 개업을 하는 게 순서일세. 그래야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어. 단 하루를 해도 좋으니 일단 판검사 임용을 받도록 하게. 그 이후에는 자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내가 뭐라 하지 않겠네. 그리고 남을 돕는다는 것은 원래 자기가 충분히 먹고 살 기반을 가진 다음에 가능한 일일세. 돈도 없이 어떻게 남을 돕나? 그러니 자네부터 남을 도울 만한 위치에 올라가는 것이 바람직한 길이네.”
장인의 말씀대로 좋은 성적으로 검사 임용이 되면 그가 자유로워질까요? 한 가지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층층시하의 검찰 조직 안에서 괴로워하는 그에게 아마 좋은 선배 부장검사가 이런 충고를 해줄 것입니다.
“일단 부장이 될 때까지만 참아봐. 그 다음에는 정말 자네 마음대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날이 온다네. 부장도 못 해보고 그만둔 사람을 누가 검사로 쳐주기나 한다던가? 이미 이 길에 들어선 이상, 지금 와서 길을 바꾸기도 쉽지 않네. 나중에 부장만 딱 달고 나서 개업하면 초기에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그 돈으로 자네가 하고 싶던 좋은 일을 하면 되지 않겠나? 그리고 사실 검사 일만큼 보람있는 일이 어디 있나? 변호사만 남을 도울 수 있나? 검사야말로 도울 수 있는 좋은 자리지.”
이런 충고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자녀들 사교육비로 엄청난 돈을 지출해야 하는 중년의 남성이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의 묘비명에는 이런 문구가 남게 되겠지요. “평생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겠다고 ‘생각만’ 한 사람, 여기 잠들다.”
이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저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제 동료들의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패배자로 낙인찍히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 두려움은 특권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로 이어집니다. 법조계에서는 법조계의 논리가 있고, 법조계만이 지닌 사람의 평가 기준이 있습니다. 사법연수원에는 사법연수원의 논리가, 검찰에는 검찰의 기준이, 법원에는 법원의 기준이, 대형 로펌에는 대형 로펌 나름대로 성공을 평가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리고 법조계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쓸데없이 튀지 말라” 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조계의 제3의 논리입니다. 튀는 사람에게는 무척이나 가혹한 곳이 법조계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 시민단체에서 쥐꼬리만 한 보수를 받으며 일하는 변호사들, 무료 상담을 자원하는 사람들도 법조계 내부의 눈으로 보면 그저 ‘튀려고 하는 사람들, 그렇게 떠서 국회의원 하려는 사람들’ 에 불과합니다. 어차피 남을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 수재집단에게 튀는 동료의 존재는 술안주로 씹기에 딱 알맞은 대상입니다.
이런 법조계 분위기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향한 삶을 시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몸을 던진’ 변호사의 삶은 법조계의 내부의 논리에 따르자면 “그저 공부를 못해서 판검사 임용을 못 받고(제1논리), 그러다 보니 실력도 못 갖춘 사람(제2논리), 어떻게든 뜨려고 발버둥치는(제3논리)” 것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사법시험을 준비할 당시 한결같이 그런 삶을 지향했던 사람들이 모두 다른 길로 가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법조계 내부의 논리와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일반 시민들이 기대하는 법률가의 모습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안타까운 현실……. 처음에는 그 현실에 저항하던 사람들도 연수원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는 가운데 점차 전형적인 법조인의 모습으로 변해가게 됩니다.
특권집단의 이상한 군사훈련
저는 군복무 기간 동안 얼차려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장교로 복무했으니 임관 이후에야 얼차려를 받지 않은 것이 당연할 수 있지만, 장교훈련 기간 동안에도 얼차려를 받지 못했습니다. 저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저하고 함께 훈련을 받았던 장교 후보생 중 누구도 얼차려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받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게 말이 되냐고 생각하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제가 얼차려를 한 번 받지 않고 훈련을 마친 이야기는 내면화된 우리의 특권의식이 어떻게 외부로 표출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입대 후 며칠 되지 않아, 옆 내무반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치 싸움을 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무슨 일인지 고개를 내밀어보니, 동료 후보생 한 명이 구대장으로부터 뭔가를 지적받고 있었습니다.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이불을 제대로 개지 않았거나 사물함 정리를 제대로 안 했다는 젇오의 아주 사소한 지적이었을 겁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까지 마친 우리들은 막 중위를 단 구대장보다 적게는 두 살, 많게는 대여섯 살이 많았지요. 패기에 넘치던 구대장은 그 자리에서 나이든 후보생에게 ‘팔굽혀펴기 10회’를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보생은 “그런 건 할 수 없다” 고 말했습니다. 구대장은 “명령에 불복종하면 벌점을 부과하겠다.” 고 말했습니다만, 후보생은 “맘대로 하라.” 며 눈도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언성이 계속 높아졌습니다. 누구나 상상할 수 있듯이 상당히 살벌한 분위기였지요. 구대장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훈육대장에게 보고하겠다고 자리를 떴습니다.
그때 우리 117명을 대표하는 최연장자 형이 나서서 훈육대장과 담판을 벌였습니다. 담판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습니다. 싱싱하고 정의감에 넘치는 구대장과는 달리 훈육대장은 능수능란한 고참 소령이었습니다. 군법무관 후보생들과 충돌하여 시끄러운 소리를 내느니 조용히 타협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이었지요. “명예를 중시하는 귀관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앞으로 팔굽혀펴기 같은 것을 시키지 않겠다. 나는 여러분들이 한국 최고의 지성인들답게 알아서 훈련에 응해줄 것을 믿는다.” 대충 이런 면피성 훈시가 있은 후에 우리는 훈련 끝날 때 까지 한 번도 얼차려를 받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얼차려 대상이 제가 아니었던 것은 저에게나 117명 동기들에게나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명령대로 팔굽혀펴기 10회를 실시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더라면 구대장과 후보생들 사이의 첫 번째 기싸움에서 패배한 불명예를 제가 뒤집어썼을 것이고 훈련도 몇 배는 힘들어졌겠지요. 다행이 심지가 굳은 동료가 첫 번째 규율 위반자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앞선 법무관들의 예에 따라 무척이나 쉬운 훈련을 받게 된 셈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들 사이에 팔굽혀펴기 같은 건 하지 말자고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육체적인 처벌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일종의 묵시적인 합의에 속했습니다. 그런 처벌을 받기에는 우리 나이가 너무 많고 그런 처벌이 없어도 필요한 훈련이라면 충분히 잘 받을 수 있으며 더욱이 우리는 군대에 법무관 역할을 하러 온 것이지 전투병과 장교 노릇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의 바탕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역시 내면화된 특권의식이었습니다.
사관학교에 들어가고 일주일쯤 되었을 때는 휴게실 게시판에 신문기사 하나가 붙었습니다.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판검사에 신규 임용된 사람들의 명단이었습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우리와 함께 사법연수원에 재직하던 동기생들의 이름을 보는 우리들의 마음은 상당히 착잡했습니다. 그들은 판검사의 자리로 바로 가는데, 우리는 계급도 없는 후보생의 신분으로 훈련을 받고 있다는게 좀 억울하게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날 저녁에는 법무훈육대 동기생 전체 회의가 열렸습니다. 첫 번째 회의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12주 훈련기간 동안 두 번 밖에 허용되지 않는 외박을 어떻게 세 번으로 늘리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 해인 제22기 연수생들까지만 해도 3회 허용하던 외박이 우리 때 와서 2회로 줄어든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 우리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사관학교 측은 외박에 관한 방침이 바뀐 것이므로 외박 횟수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고 대신에 매주 면회를 허용해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후보생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절대 타협해서는 안 된다며 집단행동을 불사하겠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3주 정도 지난 후에 학교 측에서는 외박 횟수를 1회 늘려주겠으니 대신 훈련에 열심히 응하겠다는 약속을 해 달라는 새로운 조건을 내놓았습니다. 우리 요구가 관철된 셈이었지요. 그런데 그에 대한 후보생들의 반응이 또 재미있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치사하게 그런 양보를 할 수는 없고, 차라리 외박을 안 가도 좋으니 절대로 저들의 요구대로 훈련에 열심히 응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훈련에 열심히 응하는 것이 마치 군사정권에 순응하는 것이라는 듯, 나중에는 “이유는 없다. 무조건 개기자.” 는 의견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기도 했습니다.
훈련 시작 1개월이 지난 후 가족들과 첫 번째 면회가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내려온 버스들이 제3사관학교 교정에 늘어섰습니다. 한 달 만에 가족들과 함께한 시간은 누구보다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면회 이틀 후, 수류탄 투척 훈련장에서 훈육대장으로부터 “훈육대로 돌아가면 귀관들에 대한 놀랄 만한 조치가 기다리고 있다.” 는 통보를 듣게 되었습니다. 막사로 돌아가니 면회때 후보생들의 가족들에게 전달받아 숨겨 들어온 다량의 술병이 모두 적발되었더군요.
면회 끝난 후 술병을 찾기 위한 소지품 검사가 있으리라는 것을 똑똑한 후보생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면회일 저녁 후보생 대표가 술병을 모두 걷어 폐쇄창고에 숨겨놓았고 이름 대신 가명이나 A, B, C 등으로만 표시를 해놓았지요. 그렇게 기호로만 표시해놓으면 나중에 우리는 술병을 찾을 수 있지만, 구대장들에게 걸릴 경우에는 모두가 발뺌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정발 법률가들다운 치밀한 대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구대장들이 그걸 찾아낸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습니다. 너무 치밀했던 우리 후보생 대표가 이름 비슷한 두 사람을 구별하느라 그들의 이름만 본명으로 적어놓았던 것이지요. 학교 측이 놀랄 만한 조치라고 이야기했던 것은 바로 그 두 사람에 대한 징계 절차였습니다. 이들에 대한 징계는 결국 외박 전면 통제 및 한계 벌점의 50퍼센트 부여로 결론이 났지요. 다른 장교 훈련과정이었단면 예외 없이 퇴교 조치를 받고도 남을 사안이었지만, 역시 ‘법무’ 는 강하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결정이었습니다.
사관학교 측의 징계 결정에 대한 후보생 측의 대응은 지금 생각해봐도 터무늬없었습니다. 징계 결정이 알려진 그날 저녁부터 단식투쟁을 시작한 것입니다. 식당 앞에 정렬하여 식사하러 들어가려는 순간, 모두가 징계 철회 때까지는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버텼고 당황한 구대장들은 일단 우리를 내무반으로 돌려보낸 뒤 상부에 이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식사 거부를 선언하고 내무반에 들어가자마자 후보생 자치회에서 초코파이 2개, 썬듀1개, 초코바 1개씩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저녁식사 대신 자치회에서 준비한 음식들이었습니다. 표면상으로는 단식투쟁이지만 실제로는 간식을 먹어가며 하는 간식투쟁이었던 셈이지요. 군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항명 건을 터뜨리고 나서도 내무반에 모여 있는 동기생은 천하태평이었습니다. 각자 신문보고, 책 읽고, 바둑 두고……. 저는 주로 아내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지요.
중간 중간 투쟁 방향에 대한 토론도 열렸습니다. 이런 이상한 투쟁에 대한 반대 의견도 없지 않았지만 결론은 늘 가장 강경한 쪽으로 나기 마련이었습니다. 단식이 이틀째 계속되자 사관학교 측에서는 더 이상 그대로 놓아둘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117명 전원을 퇴교시키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기생들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모두 자르고 나면 육·해·공군 전체의 군 사법 업무가 마비되리라는 현실적 계산과 함께 ‘감히 누가 우리를 자르겠느냐’ 는 자신감이 넘쳐흘렀습니다. 단식투쟁의 논리도 차근차근 마련되었습니다. 사법연수원을 수석으로 마친 친구에게는 학교장에게 보내는 성명서 작성이 맡겨졌고, 거기에는 징계 문제뿐 아니라 추운 날씨와 난방시설 고장으로 우리가 겪고 있는 동상의 아픔 같은 문제도 추가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억지스럽던 주장들이 장문의 성명서로 꾸며지자 완전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단식 사흘 때 저녁. 동료 중 한 명이 식당 앞에서 “나는 이제 배신자 소리를 듣든 무슨 욕을 먹든지 간에 내 양심에 따라 행동하겠다.” 며 혼자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비록 식사 거부는 하고 있었지만, 매 끼니 때마다 식당까지 행진해 가서 식당 앞에 마치 연좌시위를 하듯 앉아 있다 돌아오는 일은 계속되던 때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렇게 선언하고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평소 사람들과 그리 섞이는 편이 아니었던 그 후보생의 행동은 다른 동조자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지도자였던 후보생 대표는 “이제 의사 표시는 충분히 한 것 같으니 식사는 하자.” 고 동기들을 설득했지만 여전히 다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그도 나중에는 지쳐서 한 발 물러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는 아내에게 “내 생각에는 117명 전체를 퇴교시키는 것이 군 전체를 위해서 좋은 것 같다. 몇몇 졸병들을 잡아 군의 기강을 잡는 것보다는 이런 기득권 집단을 과감히 뭉갬으로써 문민시대를 맞이하는 새로운 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옳다.” 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날 저녁에는 우리들 처리 문제가 국방부에서 논의 중이라는 소식이 들렸고, 후보생들은 오랜 토의를 거친 끝에 다시 식사를 하기로 의견을 모았지요. 이미 이탈자가 생긴 이상, 단식을 계속할 명분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 단식 중단의 이유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3일 간의 단식이 끝나자 후속조치가 이어졌습니다. 우선 술이 적발되었던 징계 대상자들에 대해서는 외박 전면 통제가 아니라 외박1회 통제로 처분이 가벼워졌습니다. 국방부는 원래 단식 주동자 10명을 색출하여 퇴교시키고, 나머니 107명에 대해서는 군법무관 수급에 차질이 없도록 이후 ‘무슨 사고를 치든 무조건’ 임관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에도 겁을 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주동자 색출이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고, 연수원 시절의 우정에다 훈련받으며 쌓인 동지애로 뭉친 사람들이 주동자 색출에 협력할 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이렇게 조용히 해결되었습니다. 아무도 징계를 받지 않았고, 젊은 후보생 117명은 다시 한 번 자신들의 파워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17명을 전원 퇴교시키고 이 사건을 신문 기사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젊은 구대장 한 명은 이후 “군 생활이 싫다.” 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이 특권집단이 가진 힘과 현실의 벽이 너무나 높았던 셈입니다. 후보생 내부에서는 오히려 “얻은 것도 없이 너무 빨리 투쟁을 종결했다.” 고 비판하는 강경론자들도 없지 않았지만 우리들의 싸움은 이렇게 끝났지요.
보기에 따라서 강자에 맞서는 법률가들의 결연한 의지로 비칠 수도 있는 사건이었지만 제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지도하는 훈육대장이나 구대장들, 심지어는 별을 단 장군들조차 분명히 사회적 강자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117명 특권집단의 눈치를 보는 데 급급한 나약한 사람들에 불과했습니다. 친구나 선후배는 대개 법조인들이었고, 동기생들은 이미 판검사가 되어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무엇보다도 후보생들 자신이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단식투쟁이 끝난 후에도 훈련받는 내내 우리는 중요한 안건이 있을 때마다 모든 일과가 끝난 다음 117명이 모여 회의를 했습니다. 유격훈련은 얼마나 열심히 받아줄 것인지, 행군 갈 때는 군장에 어느 정도나 짐을 꾸려 갈 것인지 등등이 주된 논의 대상이었지요. 그런 회의 중 어느 날인가는 아주 젊은 동기생 하나가 “군법무관 치고 도대체 우리처럼 열심히 훈련받는 사람들이 어디있냐. 나는 내일부터 아침 점호에 안 나가겠다.” 라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그 친구는 자기가 말한 대로 진짜 아침 점호에 안 나갔고, 징계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연대장에게 “나를 처벌하면 전후방의 군법무관들이 가만히 안 있을 것이다.” 라며 오히려 큰소리치기도 했지요. 그렇다고 그 친구가 악독한 사람이거나 군대에 대해서 심한 악의를 지닌 사람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보면 순진하고 착한 사람이었는데 아직 어린 나이라 치기가 좀 강한 편이었지요.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 친구도 아무 처벌 없이 넘어갔습니다.
시험 때 손바닥에 커닝 문구를 적어 놓았다가 교관이 손바닥 검사를 하겠다고 하자, 한 후보생이 손을 들고 일어나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 침해’ 라고 강력히 반발한 일도 있었습니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117명의 두뇌들이 모두 그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손바닥 검사를 거부했지요. 훈련 기간 12주 동안 이런 식의 크고 작은 집단행동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지금은 다 기억할 수도 없습니다.
군대에 다녀온 분이라면 제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리 군법무관들이지만 설마 그럴 수가 있었겠냐고 생각하실 겁니다. 얼차려를 거부한다든지, 면회 때 술병을 반입한다든지, 그게 적발되자 오히려 단식투쟁에 나섰다든지, 그런데도 아무 일 없이 넘어 갔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모두 딴 세상 이야기처럼 느껴지시겠지요. 하지만 군대라는 곳은 놀라울 정도로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초반부터 누가 더 강자인지를 확실히 보여줬고 일단 관계가 정리된 후부터는 모든 것이 수월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믿지 못하시겠지만, 적어도 우리 기수까지의 군법무관들 중에서는 우리가 가장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우리보다 드셌던 어느 기수는 행군 도중 일부가 이탈하여 목욕탕에 가서 총을 세워놓고 목욕을 한 후 택시를 타고 집결지로 갔다는 전설 같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야전삽이 무겁다는 이유로 쇠로된 부분을 잘라낸 후 달랑 나무 손잡이만 군장에 달고 다녔다는 기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들 모두 그런 행동에도 불구하고 법무관으로 임관했고, 이후 3년 동안 군검찰관, 군판사, 법무참모, 송무장교 등등 다양한 보직을 오가며 군대 내의 모든 사법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군무 이탈이나 항명을 한 사람들을 군교도소로 보냈고, 사소한 명령 위반자들을 징계에 회부했습니다. 훈련받을 당시의 태도대로라면 군대에서 벌어지는 각종 불의에 맞서 결연히 투쟁하는 법무관으로 인해 사건이 넘쳐나야 했을 테고, 군 내부의 압력에 맞선 양심선언들이 끊임없이 터져 나와야 했을 테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막상 군검찰관이 된 다음에는 우리들 대부분이 정작 해야 할 일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군 내부의 비리를 캐내려면 우선 우리가 깨끗해야 하는데, 우리들은 출근을 대충하거나 각종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특권을 누리는 대가로, 법무관 고유 업무를 상당 부분 포기하거나 방관했습니다. 어떻게든 3년만 때우고 나가면 된다는 의식이 우리의 정의감을 누른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은근슬쩍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된 특권의식은 결코 그 3년의 군복무와 함께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우리는 일반 시민들과 전혀 다른 새로운 계급을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괴물의 수족이 된 사람들
법은 기본적으로 국가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은 이미 여러 번 드렸습니다. 법이 국가를 통제하기 위한 도구하면, 법률가들은 바로 그 법이 올바로 기능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법전 속에서 잠자고 있는 법이 우리 생활 속에서 살아 숨 쉬며 국가의 괴물화를 방지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손발 역할을 하는 것이 법조인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국가를 통제해야 할 법을 운용하는 사람들이 시민의 이익 대신 자신들의 이익만을 챙기게 되었을 때 우리 사회의 정의가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현상을 이미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맡겨진 역할 수행을 포기한 채, 자기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게 된 법률가들은 결국 괴물의 수족 신세로 전락하게 됩니다.
1982년, 부산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주도한 문부식 씨의 책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문부식 씨가 고문을 당하고 있는 조사실에 수사를 지휘하는 검사가 찾아온 적이 있답니다. 검사는 심각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흰색과 노란색과 검은색 가운데 어느 색이 가장 좋은가?” 문부식 씨는 도무지 그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요. 특별히 좋아하는 색이 없다고 하자 검사가 이번에는 이렇게 고쳐 묻더랍니다. “그 셋 중에서 어느 색을 가장 싫어하는가?” 특별히 싫어하는 색도 없다고 하자 검사는 묘한 미소를 짓더니 방을 나가버리더랍니다. 문부식 씨는 아직도 그 검사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그는 아마 내가 흰색을 증오하고 노란색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편집증적인 민족주의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라는 추측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의문을 던지지요. “그거싱 어려운 사법고시를 패스해 검사가 된 한국 엘리트의 의식 수준이었다면?”
이 이야기를 읽고 나서 저도 역시 그 검사가 왜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상한 질문을 던진 뒤 묘한 미소와 함께 방을 떠나는 그 검사의 표정만은 마치 눈앞에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그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비슷한 법조인들을 너무 많이 보아온 까닭입니다. 피의자가 고문을 당하는 현장에 와서 고문을 중단시키지는 못할망정, 자기 머리에서 애써 생각해낸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이나 던진 다음, 그 질문을 던진 자기 머리의 명석함에 스스로 만족하며 고문 현장을 떠났을 그 검사의 모습은 문부식 씨가 던진 질문에 명확한 답을 제시해줍니다. 바로 그것이 어려운 사법시험을 패스해 검사가 된 한국 엘리트들의 의식 수준인 것입니다.
검사나 판사들이 정치범들에 대한 가혹행위에 ‘사실상’ 가담한 이야기는 문부식 씨 경우 이외에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문부식 씨의 책에는 방화사건 이후 함께 구속된 동료들이 받은 고문 이야기도 나옵니다. 사건 직후 부산 치안본부 대공분실 조사실로 끌려간 문씨의 여자 동료들은 건장한 체구의 남자 수사관들에게 의해 알몸이 되어 욕조에 거꾸로 처박혔고, “너 몇 번 해봤니? 너희들 자취방 같은 데 모여서 그룹 성교 자주했지?” 같은 추잡한 질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채 겁에 질려서 팬티에 방뇨한 것을 돌볼 겨를도 없었던 나이 어린 여학생들의 귀에 대고 그들이 속삭인 질문들이었습니다.
국가 권력으로부터 ‘남의 몸을 마음대로 다룰 권한’을 위임 받았다고 착각한 사람들은 결국 노동운동에 뛰어든 여대생을 노골적으로 강간하는 범죄행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문귀동에 의해 자행된 성고문 사건이 그것이었지요. 물론 이런 가혹한 고문의 주범은 이근안, 문귀동을 비롯한 경찰 수사관들 또는 정보기관의 요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문 끝에 범행을 자백하고 검찰에 송치된 피의자들을 수사하고 기소한 검사들과 이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판사들은 과연 이들이 고문 받았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1979년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고자 난로를 껴안았던 서승 씨의 경우, 그가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이 검사였다고 증언합니다. 조서를 작성해 발 도장을 받으러 온 것이었지요. 그 다음에는 서울지법 판사실로 나가 이름, 주소 등을 확인한 후 서울구치소에 수감됩니다. 전신에 화상을 입은 서승 씨의 모습을 본 판검사들은 그가 고문 끝에 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2002년 11월 서울지검의 젊은 엘리트 검사가 피의자가 고문치사 혐의로 구속되던 날, 저는 연구실에서 책 한 권을 받았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죽음》. 1973년 중앙정보부의 고문에 목숨을 잃은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의 삶을 추모하는 책이었지요. 강신옥, 김근태, 김정남, 김학준, 문정현, 박형규, 백기완, 백낙청, 이부영, 장기표, 한완상 등 가나가 순서로 정리된 필자들의 이름을 짚어가는 가운데, 저는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비록 다양한 정치적 입장 속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드링지만, 이들 모두는 지난 시절 끔찍한 고문의 대상이 되어본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문부식, 권인숙, 서승 뿐만 아니라 독재의 어두운 그늘 아래 참으로 많은 고문 피해자들이 남겨진 것입니다.
그런데 건국 이후 수없이 자행된 고문과 조작의 기록들 사이에서 우리가 종종 간파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즉, 어떤 고문이나 조작도 법률가들과 완전히 무관하게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고문이나 조작도 법률가들과 완전히 무관하게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고문의 전제가 되는 구속은 검사의 영장 청구와 판사의 발부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물론 유신헌법 치하의 불법 불량국가 시절에는 판검사의 개입 없이도 정보기관들이 마구잡이로 사람을 잡아다 고문하는 일이 없지 않았지요. 그러나 그런 무지막지한 경우에도 결국은 법률전문가들의 손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많은 판검사들이 때로는 소신에 의해, 때로는 정보기관의 눈치를 보며, 구속영장, 피의자신문조서, 공소장, 판결문 등 각종 문서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습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의 노력에 의해 인혁당 간첩조작사건 등 많은 사건이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에 의해 조작되었음이 밝혀지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 수많은 서류들에 서명 날인했던 법률가들의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참 신기한 일이지요. 아마도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지금의 잣대로 그 시절을 단죄해서는 안 된다고. 그 당시에는 간첩인 게 분명해서 그렇게 판결했다고. 먹고 살자니 어쩔 수가 없었다고(이런 변명이라도 하는 사람은 그나마 양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법률가는 다른 직업과 다릅니다. 판검사들의 서명 날인 행위가 고문 경찰관이나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의 행위와 똑같이 취급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판검사는 ‘그 자리를 그만두고 나와도 오히려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이 나라에서 거의 유일한 직업이기 때문이죠. 그때도, 지금도 그들에게는 공직을 떠나 변호사로 일할 무궁무진한 기회가 열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문과 조작의 희생자가 분명한 사람들의 공소장과 판결문에 자기 이름을 적어 넣었고, 그 공로로 지금도 이 나라 어딘가에서 여전히 회전의자에 앉아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자기 기관의 최고위직에서 자유와 인권에 관한 고상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향해 열심히 뛰고 있는 사람들 중에 ‘그들’ 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근안 씨처럼 직접 손에 피를 묻혀 가며 ‘반공 일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들 중 일부는 고문기술자로 몰래 감옥에 갔습니다. 감옥까지는 안 간 사람들도 이제는 그 화려한 과거를 숨긴 채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같은 일에 ‘간접적으로’ 관여한 법률가들은 이상하게도 여전히 잘 나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국회의원이 되어 공안을 주특기로 삼던 자신의 검사 경력을 여전히 자랑으로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인생관을 바꾼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부림 사건을 수사한 최병국 한나라당 의원은 2000년 총선 당시 시민단체에 의해 낙선대상으로 지목되자 “부림 사건은 부산 운동권이 지하로 들어가 처음으로 주사파 학습을 시작한 충격적인 사건으로 이들 바로 다음 세대가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켰다.” 는 반론을 폈고 결국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대통령 선거 기간 중 노무현 후보에 대해 “고문만 물고 늘어진 떨거지 변호사로 보고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는 냉소적인 한마디를 던져 화제를 낳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초반 서울지검 남부지청에서 공안 검사로 일하며 명성을 날린 김원치 전 대검 형사부장은 노무현 정부의 검찰 개혁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글을 검찰 통신망에 올려 유명해지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지금도 잘 나가고 있고 앞으로도 아마 변함 없이 잘나갈 것입니다.
미셸 푸코(후기구조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철학자)는 사법당국으로부터 형의 집행이 떨어져 나감으로써 법률가들이 ‘처벌’ 이라고 하는 불명예스럽고 불유쾌한 일을 직접 수행하지 않게 된 과정을 신체형의 소멸과 관련하여 흥미롭게 설명합니다. 형벌의 집행이 자율적인 영역이 되고, 행정기구가 사법당국이 담당하던 일을 면제해주어, 사법 쪽은 형벌의 관료정치적인 은폐의 도움으로 그 막연한 불쾌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푸코의 주장입니다. 사법과 형벌의 분리를 이야기한 푸코의 주장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저는 이런 ‘막연한 불쾌감으로부터의 자유’를 우리나라 법률가들만큼 제대로 누린 사람들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세월 고문에 간접적으로 관여해온 법률가들은 직접적인 가해자 역할을 대공 경찰 또는 정보기관의 손에 맡김으로써 모든 윤리와 도덕으로부터 파렴치한 자유를 누려왔습니다. 붙잡혀온 피의자, 피고인이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어도, ‘내가 고문 장면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고, 내가 고문을 지시하지 않은 이상, 나는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 는 자기 암시를 수십 년 동안 반복해온 것입니다. 그런 거짓말을 계속하다 보니 이제는 스스로도 그 거짓말을 믿게 되어 ‘공안사건에는 언제나 고문당했다는 주장이 있기 마련이며 이건 빨갱이들의 상투적인 수법’ 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역사 속에서 엄청난 고문과 억지 자백의 선수로 인식되어온 종교재판관들은 검사와 판사, 고문기술자, 처형자의 역할까지 모두 직접 또는 자신의 지휘아래 수행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그대로 고문과 처형을 직접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세월 동안 고문과 조작에 관여했던 우리 법률가들은 중세의 종교재판관들 수준의 책임감도 지니지 못한 파렴치한 사람들입니다.
뻔뻔스러움이 도가 지나쳐 억사 앞에 자랑스럽게 자기 이름을 밝힌 몇 사람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그 많은 법률가들의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피해자들도 “이제 다 지난 일 아니냐.” 며 그들의 이름을 밝히는 데 소극적입니다. 여의도 언저리를 돌고 있는 피해자들 중에서는 “그들을 용서했다.” 며 먼저 손을 내민 사람들도 없지 않습니다. 잘못한 사람은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는데, 참혹한 고문의 희생자들이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는 이 장면이 제 눈에는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이라도 고문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법률가들의 이름을 알고 싶습ㄴ디ㅏ. 그들의 참회와 변명을 듣고 싶습니다. 미국처럼 일정 기간이 지난 역사 속의 문서들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거기에 서명 날인된 이름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권리도 누려보고 싶습니다. 그런 이름들이 만천하에 공개될 때 비로소 판검사들도 자신들의 행하는 하루하루의 임무가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전제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국가의 괴물화를 막아야 할 법률가들이 오히려 괴물이 된 국가 권력의 손발이 되어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한 사례는 세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제 정신을 되찾은 후에도, 괴물의 수족이 되었던 법률가들이 우리나라처럼 떳떳하게 잘살고 있는 사례란 찾기 쉽지 않습니다. 과거에 대한 반성 없이 더 나은 미래는 만들 수 없습니다. 역사 앞의 정직한 반성과 공개만이 고문 재발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들만의 엘리트 공동체
서정우 변호사가 이회창 씨의 대선 비자금 모집책 노릇을 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법조인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갈렸습니다. 저 같은 삼류 변호사들은 ‘그런 분이 도대체 왜 그런 일에 끼어들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고, 서 변호사와 가까운 일류 법조인들은 ‘걱정스러웠는데 올 것이 오고 말았단’ 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서정우 변호사가 법조계 안에서는 워낙 유명한 분야였기 때문에 그만큼 법률가들이 받은 충격도 컸습니다.
저도 사법연수원 시절 서울 고등법원 부장판사이던 서정우 씨로부터 강의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만한 깔끔한 인상을 가진 고위 법관이었습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까지 올라간 분들 중에서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기로 소문난 성깔 있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만, 서정우 부장판사는 누구에게나 대체로 평이 좋은 겸손하고 온유한 분이었습니다. 실력을 갖춘 분답게 사법연수원 강의에서도 “실력 있는 법조인이 되라.” 고 우리들에게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사법연수원에서 강의를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정우 부장판사가 개업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서 판사의 퇴직은 당시 여러 신문에서 다룰 정도로 비중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신문들은 서 판사에 대해 “평소 명쾌한 법해석 논리와 행정실무 능력까지 고루 갖춘 데다 항상 동기생 중 선두를 달려온 법원의 재목” 이라면서 “서울법대 수석 졸업의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어 법원에서는 그의 퇴진을 큰 손실로 여기고 있다.” 라고 보도했습니다. “장래 대법관 후보로 꼽히는 서정우 고법 부장판사까지 사표를 냈다는 소식을 듣고 현직에 남아 있어야 하는 가에 회의가 생겼다.” 는 소장 법관들의 고뇌를 기사화 한 것도 눈에 띄고, “국가에 대한 봉사 의무를 어느 정도 했으니 이제 가정에도 충실하면서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것” 이라는 서 부장판사 본인의 언급을 기사화한 것도 보입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까지 올라갔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느낄 정도로 청렴한 생활을 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내용들이었습니다.
보통은 승진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변호사 개업을 하기 마련인데, 서정우 부장판사의 경우에는 승진도 할 만큼 했고, 장래도 확실히 보장된 상태에서 개업을 했기 때문에 화제가 되었을 겁니다. 이런 박스기사들이 나간 것에 대해 그는 훗날 ‘기자들하고 친한 덕분’ 이라고 겸손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으로 일할 다잇 오보를 막기 위해 판결이 날 때마다 “기사를 제공하고 박스기사까지 주제를 잡아주곤 해서 기자들이 좋아했다.” 는 것입니다.
개업 이후 우리는 상당히 자주 서정우 변호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슬롯머신 업계를 대부 정덕진 씨의 동생 정덕일 씨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이건개 전 대전고검장, 상지대 운영 비리 혐의로 구속 기소된 김문기 전 민자당 의원, 성수대교 붕괴 사건의 서울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명예훼손 사건의 피고 김진명 씨,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과 한보 특혜대출 비리 사건의 정태수 총회장, 외환위기 축소은폐 사건의 강경식 전 부총리, 대우그룹 경영비리 사건의 유기범 대우통신 사장, 아시아 자동차를 상대로 4천억대 사기행각을 벌이고 브라질로 도주한 희대의 사기범 전종진씨, 듀스 멤버 김성재씨 살해 사건의 피고인 김유선 씨 등. 90년대 초중반 서정우 변호사의 고객 명단에 올랐던 사람들은 대부분 보통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맡은 사건의 규모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그는 그야말로 최고였고, 최고답게 강격식 전 부총리 사건, 심성재 살해사건 등에서 무죄 판결을 이끌어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큰 사건들을 많이 맡다 보니, 개업 다음 해인 1994년에는 변호사 소득 랭킹 3위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 소속 변호사들을 제외하면 개업 변호사 중 1위였습니다.
대형사건의 변호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조선일보〉가 자신 있게 도입한 변호사 사전기사열람제의 전담변호사, 행정심판의원, 방송평가위원 등으로 활동영역을 넓혀가는 한편, 이회창 씨가 국무총리, 대통령 후보로 성장해감에 따라 이씨의 대표적인 측근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지요. 한나라당의 세풍 사건도 당연히 그가 맡았습니다. 그러다가 2002년 이회창 씨가 다시 한 번 대통령 후보가 된 이후에는, 이 후보의 공식저깅ㄴ 법률고문으로 아예 전면에 나섭니다. 이회창씨가 대통령이 될 경우 법무부 장관 또는 감사원장으로 사정 업무를 주도할 사람으로 꼽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이회창 씨는 대통령이 되는 데 실패했고, 서정우 씨는 2003년 12월 8일 검찰에 긴급 체포됩니다. 그의 체포 소식도 적지 않은 충격이었지만 이후에 밝혀진 그의 모금 방법은 제 귀를 의심케 했습니다. 엘지그룹으로부터 돈을 받을 때 경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 휴게소에서 현금 150억이 실린 2.5톤 탑차 1대를 자동차 열쇠와 함께 건네받아 직접 운전해 가지고 왔다는 이른바 ‘차떼기’ 수법 때문이었습니다. 뒤이어 밝혀진 것처럼 삼성이 국민채권 방식으로 제공한 152억을 받은 것도 서정우 변호사였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자리에서 어느 날 갑자기 끝 모를 나락으로 추락함으로써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음’을 보여주게 된 것입니다.
서정우 변호사의 차떼기 사건 이후 〈한겨레〉는 그를 가리켜 “한 쪽으로는 정치권력에게 비자금을 바친 기업을 변호하면서, 다른 쪽으로는 기업을 윽박질러 천문학적인 규모의 불법 정치자금을 조달한 두 얼굴의 괴물 야누스와 같다.” 라고 평했지만, 그는 사실 이런 험한 말을 들어야 할 정도의 인격 파탄자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왜 서정우 변호사 같은 사람까지도 그런 일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는가에 있습니다.
그는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습니다.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까지 지내며 법원 내부에서도 존경받는 법관이었습니다. 기자들과 관계도 좋았습니다. 변호사 개업 이후에는 중요하다는 사건에는 거의 빠짐없이 이름을 내밀며 돈도 벌 만큼 벌었습니다. 굳이 정치에 관여하지 않아도 충분히 누릴 것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도무지 이런 일을 벌일 이유라고는 찾을 래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서정우 변호사의 비정상적인 범죄행위 가담을 이해하는 유일한 열쇠는 바로 이회창 후보와의 ‘인간관계’ 뿐입니다. 고등학교와 대학의 선후배로서, 법조계의 선후배로서 두 사람이 주고받은 특수한 관계를 빼고는 서정우 변호사가 보여준 이 이상한 행위를 이해할 방법이 없습니다.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서 변호사는 이회창 씨에 대해서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으로 꼽을 수 있는 분이다. 이론도 탁월하신 분으로 만날 때마다 왜 나는 이런 생각을 못할까 하는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법 이론뿐만 아니라 법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회창 씨와는 문자 그대로 가르침을 주고받는 정신적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음을 자랑스럽게 털어 놓고 있는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법률가 서정우의 추락은 역시 최고의 법률가였던 이회창 씨가 보여준 한계와 함께 우리 법조 엘리트들의 현주소를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한없이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이들을 나락으로 몰고 간 이 관계들을 ‘가족’ 이라는 표현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회창 캠프 내에서 불법이 자행될 경우, 그걸 가장 앞장서서 막아야 하는 사람은 법률가인 서정우 변호사입니다. 그런데 내부 통제에 앞장서야 할 법률가들로 하여금 오히려 불법에 앞장서게 만드는 구조의 중심에는 바로 ‘가족으로서 법조계’ 라고 하는 환상이 자리 잡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가족’ 은 더할 수 없이 따뜻하고 좋은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법조계에서도 ‘가족’ 이란 말이 참 많이 쓰입니다. 대부분의 검찰총장들은 신년사를 비롯한 내부용 연설문을 “친애하는 전국의 검찰 가족 여러분” 으로 시작합니다. 대법원장이나 법원장들도 취임사나 신년사에서 흔히 ‘법원 가족 여러분’ 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아무리 해도 ‘가족’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곤란한 대한변호사협회의 경우에도 협회장들은 때때로 “결국 우리는 공동운명체입니다.” 같은 말을 통해 연대감을 과시합니다. 실제로도 법조계는 지금까지 일종의 가족이었고 공동 운명체였습니다.
우선 법률가들은 사법연수원이란 단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1970년 사법연수원이 개원한 이후, 모든 법조인들은 이 하나의 국립 법률가 교육기관을 통해 배출되었습니다. 그러나 보니 법조인들은 모두 사법연수원 선후배 또는 동기라는 끈으로 연결됩니다. 거기다가 사법 연수원의 다수를 차지해온 몇몇 법대 출신이라는 끈이 추가 되면 결속은 더욱 강화됩니다. 과거에는 여기에다가 경기, 서울, 경복, 경남, 경북, 부산, 광주일고 등 몇몇 비평준화 시절의 세칭 명문고 출신 배경까지 더해짐으로써 정권의 부침에 따라 특수한 엘리트 그룹이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서정우 변호사 같은 분은 이런 엘리트 그룹의 정점에 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권력의 통제 또는 국가 권력의 괴물화를 방지해야 할 사명을 지닌 법률가들에게 이와 같은 ‘하나의 뿌리’ 는 거의 독약에 가깝습니다. 단일한 뿌리는 내부 통제를 불가능 하게 하는 가장 대표적인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처럼 인간관계가 거미줄처럼 얽힌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절대로 가족적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법조계입니다. 검사는 국가를 대신해서 범죄자와 싸움을 벌이는 존재입니다. 변호사는 국가고 뭐고 신경 쓸 것 없이 의뢰인을 위해 싸움을 벌여야 하는 존재입니다. 판사는 거대 담론과 여론으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 법리에 의해 냉철한 판단을 해야 하는 고독한 존재입니다. 이들 모두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바로 독립성입니다. 사법연수원 몇 기냐에 따라서 그의 위치가 좌우되는 풍토에서 독립성 보장이란 생각하기 힘듭니다.
실력을 갖춘 청렴한 법률가로 평가받던 사람조차 인간관계 때문에 언제든지 차떼기 범죄자로 전락할 수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이 거미줄 같은 인간관계망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인위적인 방법으로 이런 촘촘한 관계망을 끊어내기란 쉽지 않겠지만 우선 단일하고 폐쇄된 특권집단의 탄생을 막는 것으로 의미 있는 출발점을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